16990219

jiam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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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9년 2월 18일 己卯년 丁卯월 己未일, 양력 1699-03-20 1699년 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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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9년 2월 19일 기미
十九日 己未
맑음. 저녁에 흐림.
陽夕陰
정광윤(鄭光胤)인물, 김삼달(金三達)인물, 윤이신(尹爾新)인물이 왔다. 윤이신은 곧 지원(智遠)이다. 윤이신이란 이름은 내가 지어준 것이다.
鄭光胤金三達尹爾新來 新卽智遠 新之爲名 卽余所命也
극인개념 아우 이대휴(李大休)인물김(金) 상(相)인물이 있는 곳으로부터 역방했다. 근래 전염병이 도처에 유행하여 사람들이 모두 왕래하거나 방문하는 것을 꺼려서 집에 앉아 있느라, 서로 소식이 막힌 지 수 개월이 지났다. 지금에야 비로소 만나니 기쁘다.
○李棘弟大休 從金相所歷訪 近來時疾到處爲拘 人皆以往來相訪爲忌 坐以阻隔 已數月餘 今始相對可喜
연동(蓮洞)공간윤선형(尹善衡)인물이 지나다 들렀다.
○蓮洞尹善衡過
○들으니, 도목정사개념를 5일에야 비로소 했다고 한다. 영암군수는 함평의 문신(文臣) 이회원(李會元)인물이 뽑혔다. 낭주(朗州, 영암)공간는 비록 이미 쇠퇴했지만 본래 이름난 고을인데, 변방은 문신과 무관을 교대로 임명한다는 규칙이 있다고는 해도 이제껏 이회원인물과 같이 한미한 잔반(殘班)을 수령으로 삼은 적은 없었다. 그래서 이를 의아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나중에 들으니 집이 가깝다는 이유로 정수(正叟) 이이만(李頤晩)인물으로 개망(改望)했다고 한다. 정수인물에게는 여든을 바라보는 노모가 있으니 지금처럼 전염병이 만연한 때 부임하기 어려울 것임에 틀림없다. 해남현감은 유대로(劉大老)인물가 되었다. 전임 현감 최휴(崔休)인물는 떠난 지 며칠 밖에 되지 않았는데, 인수인계를 하고 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몹시 가소롭다.
○聞都目政 初五始爲之 靈巖倅以咸平文臣李會元爲之 朗雖已弊 自是名邑 雖以邊地有文武交差之規 而猶不以如李會元微殘者爲之 方以爲訝矣 追聞以家近改望正叟【李頤晩】爲之云 叟有望八慈親 當此癘疾彌漫之日 必難赴任矣 海南倅劉大老爲之 舊倅崔休離去才數日 幾不免交龜而去 極可笑也
세원(世願)인물이 《대학(大學)문헌》 외우는 것을 마치고 《논어(論語)문헌》를 배우기 시작했다.
○世願誦大學畢 始學論語
조보(朝報)개념 소식을 들으니, 경상도와 전라도 관찰사가 보고한 전염병 사망자가 경상도는 1만 4천여 명이고 전라도는 2만여 명이라고 한다. 이는 큰 수를 든 것일 뿐이다. 궁벽한 곳까지 그 숫자를 어찌 다 알 수 있겠는가? 반드시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을 것이다. 기호(畿湖)와 서북(西北)이 가장 심하고, 서울이 특히 심하다고 한다. 종로 옆 싸전과 서소문 밖 시장터는 길이 막혀 다니기 힘들 정도인 곳이었는데, 지금은 텅 비어 사람이 아주 드물다고 한다. 이는 실로 전에 없던 변고이니, 진실로 가슴이 써늘하다.
○聞朝報 兩道監司所報癘疫死者 嶺南則一萬四千餘人 湖南則二萬餘人 此乃擧大數而已 窮僻之處 豈能盡知 其數必不至此 而畿湖西北路最甚 京中尤甚 鐘樓傍米廛西小門外開市 則路塞不能行矣 今則廓如也人衆甚疎云 此實無前之變 誠可寒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