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80301

jiamdiary
이동: 둘러보기, 검색


169831
← 이전 다음 →
1698년 2월 30일 戊寅년 丙辰월 丙子일, 양력 1698-04-11 1698년 3월 2일


태그숨기기


원문이미지보기


1698년 3월 1일 병자
一日 丙子
맑음
극인(棘人)개념 황세휘(黃世輝)인물가 왔다.
黃棘世輝來
정광윤(鄭光胤)인물함평공간에서 돌아왔다. 무장현감인물이 조사를 완강히 기피하여 일이 지체되고 있다고 한다. 지금 정광윤인물이 베껴온 문서를 보니 권성(權忄+省)인물이 거론되지 않은 것은 아니고 나는 과연 모자라는 곡식이 없었다. 지금의 함평현감인물은 반드시 나를 함께 끌어들여 권성인물의 흠곡을 나누어 그 죄를 가볍게 하려 한다. 하지만 나와 십여 명을 끌어 들여도 죄는 각각에게 돌아가는데 어찌 나눈다고 가벼워 질 이치가 있겠는가. 신미년(1691) 추봉(秋捧)의 흠조(欠租) 300여 섬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받아들인 것을 기록한 도록(都錄)에 분명하게 적혀 있고, 임신년(1692) 춘분급(春分給)의 흠미(欠米) 40여석도 중기(重記)개념와 서압한 분급기(分給記)개념에 역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언경인물이 조사한 문서에는 모두 흠곡이라고 기록하였으니 그의 마음을 참으로 헤아릴 수 없다. 정광윤인물함평현감인물을 만나 얼굴을 대하고 청하니, 답하기를 “허다한 문서를 헤아릴 때 잘못하여 흠곡의 수를 기록한 것이다. 나도 흠곡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미 기록된 뒤인지라 쉽게 뺄 수 없다. 사관(査官)이 조사하고 돌아가면 반드시 스스로 밝혀질 것이니 걱정할 것이 없다.”고 했다는데, 그의 말이 더욱 이해되지 않는다. 그밖에 심방(沈枋)인물 이후의 흠곡이 매우 많은데, 무장현감인물이 반드시 사임(査任)이 바뀌기를 바라는 것은 심방을 어려워하기 때문이다. 그가 심방인물을 봐주고 나를 어렵게 하는 수법이 어떠한가? 권성인물의 계유년(1693)과 갑술년(1694) 흠곡도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 수가 매우 많다는 것을 김시량(金時亮)인물이 베껴 보낸 문서를 보고 처음 알게 되었다. 이를 거론하지 않은 것은 모두 자세히 알 수 없었다.
○鄭光胤自咸還 盖以茂倅固避査事 事將遲滯故也 今看鄭生謄來文書 則權忄+省非不擧論 而吾則果無所欠 時倅必欲挽我同入以分權忄+省欠谷輕其罪 而雖吾十輩同入 罪各有歸 豈有分而輕之之理 所謂辛未秋捧欠租三百餘石 昭載於已捧都錄 所謂壬申春分給欠米四十餘石 亦載於重記及着押分給記 而彦輕査文皆以欠縣錄 其心所在誠不可測也 鄭生入見主倅而面請之 答曰 許多文書 考算之時 誤以欠數懸錄 吾亦知其非欠 而旣入之後 不可率易拔去 若歸査官 則必自脫 無可慮者云 其言尤不可測也 其餘沈枋以下欠谷頗多 茂長之必欲遞査任 盖以沈枋爲難 其視沈枋厲我手數如何也 權忄+省之癸甲欠谷亦爲懸錄 而其數尤多 始知金時亮謄送文書 不爲擧論者 是不能詳悉也
<Term id="M361" name="승의랑">승의랑(承議郞)인물 할아버지</Person>의 기제(忌祭)를 또 흥아(興兒)인물에게 대신 지내게 하였다.
○承議郞祖考忌祀又令興兒代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