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60625

jiam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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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6년 6월 24일 丙子년 乙未월 己酉일, 양력 1696-07-23 1696년 6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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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6년 6월 25일 기유
二十五日 己酉
맑음
점쟁이 조국필(趙國弼)인물목내선(睦來善)인물 상(相)의 부름을 받아 신지도공간에 가기에, 서울공간 편지를 고금도공간에 부쳐서 보냈다.
趙卜國弼爲睦相所邀 往薪智島 付送京簡于古今島
아침을 먹고 떠나 누리치(屢利峙)공간에 이르렀는데, 별안간 어떤 어린 아이가 산 위에서 날 살려라 하고 급히 소리치며 넘어지면서 내려왔다. 돌아봤더니 큰 총각(大丱) 한 명이 짐을 등에 지고 먼저 와있었는데, 길에서 쉬고 있던 어떤 행인이 붙잡아서 총각이 짊어지고 있던 것을 빼앗자 총각 역시 날 살려라 소리치며 도망갔다. 좀 있다가 어린 아이가 왔기에 내가 그 이유를 물었다. 그 아이는 바로 옥천(玉泉)공간좌수(座首)개념양우춘(梁禹春)인물의 14살 된 가노(家奴)노비였다. 이 아이가 나주 흥룡동(興龍洞)공간에 가서 모미(牟米, 보리쌀)물품 1말 반과 자반물품 몇 마리를 가지고 오다가, 길에서 두 사람을 만나 동행하여 이 고개 아래에 도착했다. 그때 두 사람이 높은 곳에 있는 작은 길로 이 아이를 끌고 갔다. 아이가 “여기는 갈 때의 길이 아니에요.”라고 하자, 둘 중에 한 사람이 발로 그 아이의 목을 누르고 가슴, 배, 배꼽 아래를 발로 차고 짓밟았다. 아이가 숨이 막히고 인사불성이 되자, 그 사람이 짐을 지고 떠나버렸다. 좀 있다가 아이가 조금 정신을 차려서 일어나 뒤쫓았는데, 만약 길가에서 쉬고 있던 사람이 아니었으면 어찌 짐짝을 되찾을 수 있었겠는가. 내가 그런 이유로 이 아이를 데리고 석제원(石梯院)공간에 이르러 제반(除飯)을 먹이면서 “얘야, 네 짐을 내 말에 싣고 나랑 함께 가자꾸나.”라고 하자, 아이가 “온 몸이 당기고 아프며 불알이 터져서 걸음을 옮기지 못하여 못가겠어요.”라고 했다. 그대로 석제원(石梯院)공간에 떨어뜨려 머물게 하였다. 아무리 흉년이라지만 인심이 어찌 이 지경까지 무너질 수 있단 말인가.
朝食後發 到婁利峙 忽有小兒 自山上疾呼活我 而顚倒下來 顧見之 則有一大丱者 負卜而先來 路有行人休憩者 執而奪其所負 丱者亦呼活我而走 俄而小兒來到 問其所由 則乃玉泉梁座首禹春家奴十四歲兒也 往羅州興龍洞 持牟米一斗半塩魚數尾而來 路逢兩人而同行 到此峙下 兩人引渠高處小路而去 兒曰 此非去時之路矣 其一人以足壓其項 而蹴踏胸腹臍下 氣塞不省 其人負其卜而去 俄而稍甦 起而追之 若非路傍休憩之人 安能推得卜物耶 余仍率至石梯院 食以除飯曰 汝加添載汝卜於吾馬 偕我同行也 兒曰 渾身牽痛 外腎傷破 不能運步 不可行矣 仍落留院中 雖曰凶年 人心之陷溺 胡至此耶
저녁에 팔마(八馬) 본가공간에 도착했다. 집안이 무사하니 다행이다.
夕到八馬本家 家中無事 可幸
오는 도중에 목격한 광경은 다음과 같다. 기내(畿內)는 전답의 곡식들이 모두 비로 인한 피해를 입어서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 호서 지방은 꽤 자랐으나 호남 지방은 형체도 없었다. 나주 밑으로는 조금 낫지만 목화는 겨우 병든 이파리만 있고 애초부터 꽃이 필 기색은 없었다. 농사꾼들이 굶주려 김을 매지 못해 잡초만 무성해져서 밭의 모양을 전혀 알아 볼 수 없었다. 농사가 애당초 이런 꼴인데다가 도둑질 같은 걱정거리가 또 이러하니, 나는 그저 허공만 쳐다볼 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더구나 밀과 보리가 모두 결실을 맺지 못해서 서울은 전문(錢文) 1냥에 겨우 피모(皮牟) 4~5말이나 쌀 7~8되를 받을 수 있었고, 기내와 호서 역시 그러했다. 호남은 7승목에 밀 6~7말이었다. 그런데 집집마다 저축한 것이 모두 비어서 사고 팔 길도 끊겼다. 평소 배불리 먹던 사람들도 모두 어쩔 줄을 모르고, 춘궁기에 겨우 죽음을 면했던 사람들은 지금까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내가 직접 본 광경의 처참함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一路所見 畿內則田畓之谷 皆被雨損 不能暢茂 湖西則頗茂 湖南則無形 羅州以下稍勝 而木花菫有病葉而元無成就之狀 蓋農人飢不能鋤耘 雜草蕪沒 頓無田樣也 年事旣如此 而竊掠之患又如此 令人仰屋 不知所以爲言 況牟麥俱不成實 京中則錢文一兩 菫捧皮牟四五斗大米七八升 畿內湖西亦然 湖南則七升木皮牟六七斗 而人家儲蓄盡空 買賣亦絶 常年饒食之人 亦皆遑遑 春窮免死之人 到今顚連 所見慘慘 尙何言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