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41229

jiam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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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4년 12월 28일 甲戌년 丁丑월 壬戌일, 양력 1695-02-12 1695년 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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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4년 12월 29일 임술
二十九日 壬戌
바람이 불고 약간 맑음
風而微陽
아촌(鵝村)공간박진회(朴震會)인물가 와서 알현하였는데 별것 아닌 일에 대해 자못 취해서 떠들기에 내쳤다. 이 사람은 양인(良人)으로 출신(出身)개념이 된 자다.
鵝村朴震會來謁 以微細事 頗有醉言斥之 此乃良人而出身者也
별진(別珍)공간 편으로 용산(龍山)공간의 사돈 이(李) <Term id="M317" name="생원">생원(生員)인물</Person>이 보낸 편지를 받았는데, 12월 13일에 쓴 것이다.
○別珍便傳龍山査頓李生員書 卽今月旬三出也
정(鄭) 생(生)인물이 숙위했다.
○鄭生宿
○순식간에 이 해도 다 가고 하룻밤만 지나면 새해가 되니, 괴로운 감회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게다가 내년이면 내 나이 육십이 되는데, 나의 잔약한 자질로 어찌 육십까지 살리라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누이인물종형(從兄)인물이 연달아 돌아가셔서 나 혼자만 남았으니, 외롭고 의지할 곳도 없다. 모진 목숨 끊어지지 않고 눈 뜨고 여전이 살아있는데, 신세를 돌아보니 온갖 감정이 일어난다. 슬프고도 슬프다.
○倏忽之間 此歲已盡 新年只隔一宵 痛隕之懷 尤增罔極 況我明年乃六十 以余孱質 豈曾所料 舍姊從兄相繼奄忽 只余一身 孑孑無依 頑喘不滅 尙存視息 顧念身世 百感生矣 痛矣哉痛矣哉
올해 여름, 가을, 겨울의 첫 갑자(甲子) 일에 모두 비가 내렸다. 비와 물이 지나치게 많았고 눈과 추위가 전에 없이 심했던 까닭은, 모두 여기에 기인한 것이다. 옛말이 정말 그르지 않다.
今年夏秋冬上甲子皆雨 雨水之過多 雪寒之無前 皆由於此 古言信不誣矣

순천 부유촌의 어떤 부자(父子) 이야기
순천(順天)공간의 부유촌(富有村)의 어떤 부자(父子)가 청어(靑魚)물품를 팔기 위해 영남(嶺南) 땅에 갔다가 갑자기 눈 내리는 추위를 만나 그 아비가 얼어 죽었다. 아들이 시신을 지고 돌아오는데, 사람들이 시신을 꺼려서 사람 사는 집에는 머무르지 못하였으며, 이러지도 못하고 저리지도 못하고 방황하다가 아들 역시 추위와 굶주림으로 거의 죽게 되었다. 그러다 어떤 곳에 이르러 밥을 얻어먹을 생각으로 “생선 사려”라고 소리를 내었다. 주인이 사려고 하니 순천 사람이 말하기를 “내가 지금 춥고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으니 먼저 나를 먹여 주시오. 그러면 천천히 보상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주인이 이것을 믿고 바로 음식을 주었다. 조금 있으니 진짜 청어 상인이 도착하였다. 순천 사람은 주인이 더욱 믿게 하여서 자신의 행적을 덮으려고 뒤에 온 생선 장수와 생선 파는 이야기를 하였다. 순천 사람이 묻기를 “당신의 고기는 얼마나 되오?” 라고 하니 생선 장수가 답하기를 “몇 두름에 지나지 않소.”라고 하였다. 생선 장수가 묻기를 “당신의 고기는 얼마나 되오?”라고 하니 순천 사람이 말하기를 “내가 힘닿는데 까지 지고 왔으니 수가 아주 많소.”라고 하였다. 생선 장수는 바로 빼앗을 마음이 생겨 더불어 동숙하였다. 새벽이 되어 순천 사람이 일어나 보니 생선 장수는 이미 떠났는데 청어만 남아있고 시체는 없었다. 생선 장수가 애초에 문답했던 것을 그대로 믿고서 시체를 청어라고 생각하고, 자기가 가지고 온 것보다 많다고 좋아하며 훔쳐 간 것이다. 순천 사람이 소리 내어 울자 주인이 놀라서 물으니, 순천 사람이 사실대로 이야기하였다. 주인이 말하기를 “울지 마시오. 훔쳐간 자가 생선이 아님을 알면 반드시 버릴 것이니 시체는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함께 찾아보니 과연 십리가 못되는 곳에 버려두어서 시체를 찾아서 돌아왔다. 생선 장수의 생선은 모두 (…) 돌아가고 (…) 시체를 지고 돌아갔다. 아! 순천 사람의 (…) 생각으로 어찌 사람 사는 집에는 머무를 수 있었으며 (…) 아버지의 시체를 진 사람은 한순간의 임기응변에서 나온 것이니, 칭찬할 일이지 꾸짖을 일이 아니다. 주인이 순천(順天) 사람에게 (…) 비록 생선을 위해 한 것이라도 위급한 사람에 대한 의리가 아닐 수 없다. 순천 사람은 목숨을 구하고 아버지의 시체를 모시고 돌아가게 되었으며, 생선 장수의 생선이 결국 주인의 것이 된 것은, 죽은 사람의 보답(冥報)이 있어 가능했던 것이다. 이 일은 기괴한 것도 볼만 하지만, 귀신이 감응하여 뒤에 보답하는 이치도 알 수 있다. 들은 바를 적으니, 훗날 보는 사람은 한편으론 웃음거리로 삼고 한편으론 격려하고 권면할지어다.

順天富有村人有父子 爲貿靑魚 往嶺南地 猝遇雪寒 其父凍死 其子負屍回行 而屍身人皆忌之 故不得投接人家 彷徨岐路 渠亦凍餓幾死 到一處爲得食之計 作魚商之聲 主人請買之 順天人曰 吾方凍餓將死 急先食我 則徐當准償 主人信之 卽饋之 俄而眞有靑魚商來到 順天人欲益信主人之心 以牢掩其跡 與後來魚商 相語販魚之事 而問之曰 汝魚幾許 魚商答曰 不過數編 魚商問曰 汝魚幾許 順天人曰 限吾力負之 其數甚多矣 魚商卽生攘取之心 仍與同宿 逮曉順天人起視之 魚商已去 只有靑魚 屍体卽無 蓋魚商信聽初與問答之言 以屍体謂靑魚 喜其多於己所持 窃取而去也 順天人乃發聲而哭 主人驚問之 順天人 以實告之 則主人曰 勿哭也 窃去者知其非魚 則必棄之 屍体當在不遠地矣 仍與跟之 果於未十里許棄置之 乃得屍而來 以魚商之魚盡歸之■■■■負屍而返 噫 順天人之以父屍爲靑魚■■■■■■計安得投接人家■■■■■■■■■■■■■父屍者 誠出於一時之權變 可賞而不可責也 主人之△△順天人 雖出於爲魚之心 而亦不無急人之義 至於順天人 賴以得生 能返父屍 則魚商之魚 終爲主人之所得者 似有冥報而然也 此事非徒奇怪可觀 其感應報後之理 亦可見矣 聊述所聞 使後之覽者 一以爲發笑之資 一以爲激勸之地

처음에 지었던 원정(原情)개념
저는 나이 먹어 과거에 급제하여 비록 관직에 근무하는 도는 잘 모르나, 국가의 세곡(稅穀)을 마음대로 사용하여 죄를 짓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쯤은 대략 알고 있사오니, 어찌 감히 함부로 기꺼이 불법을 저지르겠습니까?
저는 신미년(1691년, 숙종 17) 4월 10일 경에 함평공간 현감개념에 제수되어 당월 28일에 임지에 도착했는데, 당시 전임 현감개념 민순(閔純)인물이 진휼(賑恤)을 아직 마치기 전에 뜻하지 않게 체직되어 물러가게 됨에 따라 제반 업무를 모두 소홀히 했을 뿐 아니라, 중기(重記)에 기록된 관수미(官需米)개념저치미(儲置米)개념 등의 곡물도 거두지 못한 바가 많았으므로, 제가 갑자기 가난한 고을의 각종 항목으로 지출할 비용에 대책이 없어서 한창 걱정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저희 고을에서 기사년(1689년, 숙종 15) 분으로 상납할 대동미(大同米)개념 1000여 섬을 배가 없어 올려보내지 못하고 고을 창고에 그대로 둔 지 이미 3년이나 지나서, 민순이 체직되기 전에도 곡식이 묵고 수가 부족하게 될 것을 걱정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고자 해당 관청에 보고하니, 선혜청개념에서 이를 허락하는 제사(題辭)개념가 제가 막 부임했을 때 내려왔사온데, 해당 곡물이 실제로 창고에 얼마나 남아있는지 상세히 조사해보니, 제사가 접수되기도 전에 민순이 이미 먼저 각 아문(衙門)의 상납미로 옮겨 썼고, 남아 있는 것은 겨우 200여 석이었으며, 40여 석은 (…) 고마청(雇馬廳)개념에 빌려주어 지출하게 하고, (…)
(…) 새로 막 부임했더니 관수미도 전혀 없었고 백성들에게 주어야할 것은 94 (…)에 이르렀사온데, 구휼행정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때에 근 100석에 이르는 관수미를 징수하기는 매우 어렵던 차에, 백성들이 이 쌀을 얻어 관수미로 충납(充納)하고 추후에 보상받기를 원하거늘, 제가 부임한 지 오래되지 않아 모든 일에 익숙하지 않던 중에, 선혜청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기를 이미 허락하였고 백성들도 허급(許給)받아 관수미를 납부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하기에, 그래도 무방할 것 같아 94석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바, 이는 실로 함부로 관수미로 옮겨 쓴 것이 아닙니다.
위 항목에서 빌려주어 지출하게 한 각 고을 미납액 중 본 고을 미납액은 모두 긴급하게 필요한 것이어서 기한에 맞춰 독촉하여 거두어 들여야 하지만, 지금은 흉년인데다가 또 봄여름 사이여서 형편상 도저히 징수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제가 나름대로 선혜청의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라는 명령이 한편으로는 백성들을 진휼하고 한편으로는 햇곡으로 바꿀(改色)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일단 먼저 긴급히 주어야할 곳에 옮겨 쓰고 때를 기다려 돌려받아 정해진 액수에 맞게 상납하면 이 또한 백성을 진휼하고 햇곡으로 바꾸는 방법이니, 백성들이 원하는 바에 따라 편의대로 처리했고 내년 상납 기한에 맞춰 액수에 맞게 배로 운반하여 올릴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임신년(1692년, 숙종 18) 2월에 제가 갑자기 면직되었고, 계절이 아직 일러 세곡을 거둬들여 배에 싣지 못했거니와, 제가 먼저 면직되어 귀향한 후 후임관이 없을 때 계속 거둬들이지 못하여 이렇게 많아지게 된 바, 이 또한 제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오며, 빌려 쓸 때 사사로운 용도로 함부로 써서 끝내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면, 제가 비록 만 번 죽임을 당한다 해도 스스로를 발명할 말이 없사오되, 이는 선혜청에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라는 명이 있었기 때문이며 함평현(咸平縣)에서 원래 올린 보고에 대한 제사가 아직도 선혜청에 있을 것이니, 지금 즉시 조사해보면 입증될 수 있을 것이며, 그 중 80여 석은 그 후 현감 심방(沈枋)인물이 또한 이미 거두어 들였으니, 그 조치의 명백함은 이 한 사안만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선혜청의 복계(覆啓) 중에서 ‘함부로 썼다’고 뭉뚱그려 칭한 것은 실로 애매한 것이로되, 국가의 막중한 세곡을 거두지 않아 100여 석에 이르게 한 것은 죄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전지(傳旨)의 사연(辭緣)을 늦게 자복하여 황공하옵니다.

初搆原草
云云 矣身晩竊科第 雖不知居官任職之道是白乎乃 至於擅用國穀 自陷罪辟 粗知爲羞恥事是白去等 何敢率意妄作甘心不法乎
矣身於辛未四月旬間 除授咸平縣監 本月二十八日到任 則前縣監閔純 於賑恤未畢之前 不意遞歸乙仍于 凡干官事 觸處疏虞哛不喩 至於重記所付官需儲置米等穀物 多有未捧是白乎等以 矣身猝當弊邑各項酬應 拮据無策 方在悶渴之中是白在如中
適音本邑己巳條上納大同米千餘石 以無船隻 不得上納之故 留在本邑庫中 已至三年之久是白乎等以 閔純未遞時 爲慮陳舊欠縮之弊 散給民結爲良結 論報該廳 則該廳許給題辭 到付於矣身到任之初是白乎矣 同穀物實留庫數 詳細査考 則題辭未到付之前 閔純已先推移於各衙門上納是白遣 餘存之數 只有二百餘石是白去乙 四十餘 □…□ 貸下於雇馬廳是白乎 □…□
■…■ 新到之初 官需蕩然是白遣 民結應納之數 至於九十四■■■白乎矣 賑政方張之際 近百石官需米 決難徵捧是白在如中 ■時民情願得此米 以爲充納官需 追後備償之計是白去乙 矣身莅任未久 凡事生疏之中 自該廳旣許分給民結 則從民願許給 以爲官需米備納之地 似無所妨是白乎乙可 九十四石零 果爲分給民結是白乎所 實非無端移用於官需之事是白乎旀
上項貸下爲白在 各邑未捧 俱是緊急需用之物 不可不刻期督捧是白乎矣 方當大無之年 又値春夏之交 萬無徵出之勢是白乎等以 矣身妄以爲該廳分給之令 一以爲賑民之地 一以爲改色之計 則姑先移用於緊急應捧之處 待時還捧准數上納 則此亦同歸於賑民改色之道是白乎乙可 一從民願 隨便處之是白遣 欲趁翌年上納之期 准捧船運計料爲白如乎
壬申二月分 矣身猝然罷歸 而節候尙早 未及收捧載船是白在果 矣身徑先罷歸之後 空官時仍爲未捧 至於此多是白乎所 此則亦非矣身所可預知是白乎旀 大槪貸用之時 若無端濫費於私用之地 而終無歸宿之處 則矣身雖萬被誅戮是白乎乃 無辭自明是白乎矣 此則旣因該廳分給之令 而本縣元狀題辭 尙在於惠廳 則卽刻取考 可以立卞是白乎旀 其中八十餘石 其後縣監沈枋 亦已收捧 則其置處之明白 擧此一款 亦可知之是白置
該廳覆啓中 渾稱擅用者 實爲曖昧是白乎矣 莫重國穀 因此未捧 至於百餘石之多 則無所逃罪是白置 傳旨內辭緣 惶恐遲晩

홍패는 이미 거두어가고 백패마저 잃고 보니
한림 진사가 모두 허명이로다
이제부터는 높은 산 밑에서 살고자 하니
‘산인’ 두 글자야 어느 누가 시비 걸리[1]

紅牌已收白牌失
翰林進士摠虛名
從此峨嵯山下住
山人二字孰能爭

김세중(金世重)이 해남(海南)공간 황원(黃原)공간양화치(楊花峙)공간에서 은(銀)물품을 캐며 산신에게 제사 지낸 축문(祝文)
유세차 계유년(1693) 7월 계묘삭 모일, 김세중(金世重)인물은 목욕재계하고 감히 금성산(錦城山)공간 신령께 고하나이다. 이 산은 남쪽 지방의 진산(鎭山)으로 보배를 감추고 빛을 지운 채 기르고 변화시킨 것이 (…). 우리 우매한 인민은 무식하여, 무궁한 신령의 교화가 몇 천만 년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이제 세중이 외람되게도 막연히 마치 마음으로 깨닫고 신령의 계시를 받은 것처럼 감히 양화치(楊花峙)공간 이마의 바위를 뚫어, 마치 조물주가 기다린 것처럼 신령한 광맥을 얻었습니다. 어찌 신령께서 저의 박복한 모습을 가련히 여겨 그렇게 하신 것이겠습니까. 반드시 국가에 필요한 용도를 위하여 비장의 보물을 열어 보여주셨을 것입니다. 삼가 물품과 과일로 제사를 올려 정성을 표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신령께서는 크나큰 은혜를 더욱 드러내시고 신령스런 하사품을 아끼지 마시어 신령의 보우와 복을 영원히 받게 해주십시오. 상향(尙饗)

金世重鑿銀于海南黃原楊花峙 祭山神祝文
惟歲次癸酉七月癸卯朔 日 金世重齋戒沐浴 敢告于錦城山之神 仰惟玆山鎭此南維 藏寶鏟彩 發育化生者 不■■■■■■我民生蠢然無知不識 神化之無窮者 不知其幾千萬年矣 今者世重猥以藐然怳若心悟而神授 乃敢釘石于楊花之巓 爰得靈脈有若造物之有待者然 豈靈神垂憐薄狀而然也 必爲國家需用 開示秘藏也 謹以酒果之奠 用伸虔誠 伏願靈神益闡鴻造 勿慳靈貺 獲受冥佑永△神休 尙饗

병진년(1676년) 2월 남쪽으로 돌아오다가 동작진(銅雀津)공간에 이르러 물품 위에서 감회를 읊다
파교(灞橋)[2] 머리의 행색이 예나 지금이 다름없어
해는 지는데 외로운 배에서 생각이 끝이 없네
반년 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 가소로워
이 길로 강동으로 건너갈 면목이 없네[3]

丙辰仲春 南歸到銅雀津 船上有感
灞頭行色古今同
落日孤舟思不窮
堪笑半歲何事業
此行無面渡江東

물품이 절어서 우연히 읊다
비 갠 남쪽 교외에 풀색이 짙어
도처의 풍광이 시를 읊을 만하네
어리석은 하인아 말이 병들었다고 탄식하지 마라
봄 산을 느릿느릿 지나가는 것도 싫지 않으니

馬蹇偶吟
雨霽南郊草色多
風光隨處可吟哦
癡僮莫歎羸驂病
不厭春山緩緩過

팔마장공간에서 도로 서울공간로 향하는데 송별시를 주는 사람이 있어, 즉시 차운하여 답하다
호남 길 멀리 떠나는 말 잠시도 지체 못하여
가고 머물며 이별의 정이 끝이 없네
알겠노라, 이별 후 그리워하는 꿈을
남쪽 하늘 긴 구름 보며 불러도 알지 못할 것을

갈림길에서 작별이 아쉬워 손을 놓지 못하네
서녘 해는 막 뉘엿뉘엿 넘어가는데
천하의 신교(神交)는 오직 나와 너
아름다운 시 한 편으로 마음을 알리라

自八庄還向京中 有人贈詩 走次以謝
湖路征驂不暫遲
離情脈脈去留時
應知別後相思夢
長遶南雲喚不知

臨歧惜別解携遲
政是風光欲暮時
四海神交惟我爾
一篇佳句寸心知

(없음)

□…□夢時把瓊琚慰遠□

가다가 주구(舟丘)공간에 이르니 김세귀인물물품을 가져와 기다리고 있어서 앞 시에 차운하다
내 행차가 무슨 일로 이렇게 더디나
단지 이별하는 정이 잠시 섭섭할 뿐이지
(…) 평소에 품은 뜻을 논하니
새 지식을 즐기는 것 만한 즐거움이 없다는 것을 알겠네

行到舟丘 金世龜携酒來待 仍次前韻
我行何事此遲遲
只爲離情惜暫時
□□□□論素抱
方知樂莫樂新知

물품 위에서 또 앞 시에 차운하다
읊으며 말 몰아 홀로 옛 장성공간을 지나는데
모래톱에서 우는 새 오후 햇살을 희롱하네
만약 ■■와 이별한 슬픔이 없었다면
나의 걸음을 늦추기에 충분한 광경이리라

馬上又次前韻
吟鞭獨拂古長城
沙上鳴禽弄晩晴
若使與■無別恨
不妨光景媚吾行

물품 위에서 우연히 읊다
역정에 해 기우는 황혼 무렵
도처의 풍광이 이별의 심사를 건드리는데
고개 돌려 보니 저녁 구름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강 건너 슬픈 노래 차마 듣지 못하겠네

馬上偶吟
驛亭斜日正黃昏
着處風光溜別魂
回首暮雲人不見
隔江哀唱不堪聞

(없음)

擬古戲作

이것은 지평(持平) 선조인물께서 지은 글인데, 간혹 남에게 보일 수 없는 글들이 있으니, 어찌 우리 집안 밖에 둘 수 있겠는가? 지금 이 일기는 또한 권수가 많은데, 기묘년(己卯年, 1819) 경진년(庚辰年, 1820)에 팔산(八山)공간의 삼종형(三從兄)인물 집에서 이 한 권과 여러 문적들을 김정각(金庭各)인물에게 값을 받고 넘겼었다가, 올해 마침 내가 백운동(白雲洞)공간에 갔더니 친구 이시헌(李時憲)인물이 김정각(金庭各)의 아들에게 빌려서 보고 있기에 값을 치르고 빠앗아 왔다. 이것은 해진 책 한 권에 불과하지만, 자손의 마음에……
경진년(庚辰年, 1820) 섣달에 씀[2]

此是持平先祖之所製述 而間有文字不可披玩於外人耳目 況豈可留置於外處乎 今此日記亦多卷數 而己庚年間八山三從兄家 以此一卷與諸文跡捧價於金庭各許■ 今余適去於白雲洞則李友時憲借覽於庭各之子 故給價奪來 此不過一弊冊以爲此子孫之心■■復如何
庚辰 臘月 書

등의 종기(背腫)
처음 종기가 일어나면 진흙으로 테두리를 만들어 종기가 있는 곳에 얹어두고, 지렁이물품를 그 안에 가득 채운다. 그 위에 불을 놓고 나오지 못하게 하면 잠시 뒤 지렁이가 모두 물로 변하는데, 다시 같은 방법으로 종기가 삭을 때까지 한다. 또 소금물품을 종기가 난 곳에 바르고, 청포(靑布)물품를 식초물품에 적셔 소금 위에 올린다. 밥숟가락물품을 숯불에 올려, 달구어지면 종기를 찜질한다. 숟가락 여러 개를 번갈아가며 찜질하는데, 역시 종독(腫毒)이 삭을 때까지 한다. 또 매화나무물품를 구하여 태워서 연기를 쬐이면 종독이 쉽게 사라지는데, 이 처방이 가장 좋다고 한다. 위의 3가지 처방은 배종(背腫)과 발제종(髮際腫), 대부분의 독종(毒腫)에 모두 효험이 있다. 매화나무를 태워 금창(金瘡)에 연기를 쬐는 것은 또한 효험이 있다.

背腫
初發 以泥作圈 安腫處 地龍多貯其內 以有火其上 使不得出 須臾地龍盡化爲水 又如之 以腫■消散爲度 又以鹽鋪腫處 以靑布浸醋■鹽上 以食匙置炭火上 乘熱熨之 以匙數介迭相熨之 亦以腫毒消散爲度 又取梅樹燒烟燻之 腫毒易消 此方最良云 右三方背腫髮際腫及凡毒腫皆效 梅樹烟燻金瘡亦奇

담(痰)의 언저리를 갈라 옻나무 즙물품으로 가득 메우고 두꺼운 종이로 덮어둔다. 다음날 진물이 흘러내리고 아울러 담의 뿌리에서 진물이 나오니 그 효험이 매우 신통하다. 발제(髮際)와 크고 작은 담종(痰腫)에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것이 없다고 한다.

괴나는 것. 피를 많이 흘려 어지러울 때, 피가 흐르는 살갗에 칠(漆)물품을 바르면 또한 신묘한 효과가 있다고 한다.

초룡담(草龍膽)물품 2돈(戔), 방풍(防風)물품 1돈을 물에 다려 2~3번 복용하면 신통한 효험이 있으며, 오랫동안 걸리지 않는다.

풍속안(風束眼), 포종(胞腫), 다라치.

문창(蚊瘡)
소금물품으로 문지르면 가려움이 멎고 바로 낫는다.
○약하게 불기운을 쬐는 것이 가장 좋다.

-破開瘡口 塡滿漆汁 覆以厚紙 翌日膿汁流下 幷其瘡根膿出 其效極神 髮際及大小瘡腫無不效云

-괴린 것 血暈 流走肌肉 以漆塗之 亦神效云

草龍膽二戔 防風一戔 水煎服二三次 神效 永不出

-風束眼胞腫라치

蚊瘡
將鹽捋之 痒止卽差 ○微燻火氣最好

천안(天安)공간 서쪽 모산면(母山面)공간 시포(市浦)공간 씨애. 천안에서 서쪽으로 가면 소사(素沙)공간의 하류인데, 소사에서 20여리 떨어져 있다. 공주(公州)공간 목사(牧使) 김정하(金正夏)인물가 살던 마을이다. 덕평점(德坪店)공간에서 왼쪽 길로 가서 대동주점(大同酒店)공간을 거쳐 가면 빠르다. 위는 이■…■

天安西母山面市浦씨애 自天安西去則素沙下流 去素沙二十餘里也 金公州正夏所居村也 自德坪店取左路由大同酒店則捷近 右李■…■
















주석[ ]

  1. 원래 신잠(申潛)이 지은 시. 《丙辰丁巳錄》, 《芝峯類說》 등 참조.
  2. 장안 동쪽에 있는 다리. 옛날 한인(漢人)이 이 다리에서 버드나무를 꺾어주며 작별했다.
  3. 고향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다는 말. 《史記·項羽本紀》의 ‘無面目見江東父老’라고 한 데서 온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