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40823

jiam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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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4년 8월 22일 甲戌년 癸酉월 戊午일, 양력 1694-10-11 1694년 8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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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4년 8월 23일 무오
二十三日 戊午
밤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아침까지 이어지다가 오후에야 그치고, 바람이 거세게 붐.
夜雨達朝 午後乃止風緊
근심과 적막함을 견딜 수 없어 정(鄭) 생(生)인물을 불러서 유숙하게 했다.
不堪愁寂 邀鄭生留之
아내인물가 가지고 있는 담뱃갑(南艸樻)물품이 스스로 소리를 냈다. 변괴가 이와 같으니, 걱정스럽다.
○室人所持南艸樻自鳴 變怪如此 可慮可慮

관찰사개념【시임(時任) 최규서(崔圭瑞)인물】의 관문(關文)개념에서 이르길 “이번에 접수한 의정부개념에서 중외에 반시하여 편당 짓지 말라고 경계시킨 관문에서 인물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과덕하고 어두운 몸으로 외람되게 큰 왕업을 맡아 사민(士民)의 위에 있으니, 낮이나 밤이나 조심스럽고 두려워 잘해 갈 바를 알지 못하겠다. 멀리 전대(前代)에 치세(治世)를 이루어 놓은 도리를 생각해 보건대, 군신(君臣)이 덕을 함께하여 힘쓰지 않은 경우가 없었으니, 당우(唐虞)와 삼대(三代) 시절에 있어서도 모두가 이 길을 밟았었다. 고요(皐陶)의 말을 상고해 보건대 「하늘이 전칙(典則)을 펴 놓았으니 우리의 오전(五典)을 신칙하고, 하늘이 전례(典禮)를 정해 놓았으니 우리의 오례(五禮)대로 하며, 모두 다 같이 돕고 공경하여 화합(和合)한다.」 하였다. 기자(箕子)가 무왕(武王)에게 말하기를 「임금은 극(極)을 세워, 이 오복(五福)을 거두어다 그 백성에게 펴 주면, 이 때 백성들이 임금이 세운 극에 대해서 임금의 그 극을 보존하게 해 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군신이 서로 마음을 같이한 것에 있어서는, 이른바 「순(舜)이 구관(九官)을 임명하니 엄숙하게 서로 겸양했다.」는 것이나, 「주(周)나라가 신하 3천을 두었으나 오직 한마음이었다.」고 한 것이 모두 이런 도리인 것이다. 진실로 삼강오상 중에서 군신의 사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 고하(高下)는 천지와 같고 은덕과 의리는 부자간과 같고 일체(一體)이기는 수족과 같고 서로가 필요하기는 고기가 물이 있어야 하는 것과 같으니, 명을 받고 목숨을 바침은 만고토록 바뀌지 않았다. 그러므로 함께 조정에 있는 사람은 또한 형제 사이나 붕우(朋友) 사이와 같은 의리가 있는 것이다. 같은 세상에 살고 있고 같은 도를 배우고 있고 같이 벼슬하는 동료이니, 교분(交分)으로 말한다면 친척이나 친구와 같은 처지에 있고, 학업으로 말한다면 시서(詩書)와 예악(禮樂)의 학습이 있고, 관수(官守)로 말한다면 공경, 대부, 사의 차등이 있다. 단지 사모하고 친밀히 믿어야할 뿐만 아니라, 또한 반드시 서로가 임금을 아끼고 국가에 충성하는 정성이 독실해야 하는 법이니, 이것이 삼대(三代)의 융성했던 때에 군신이 같은 덕과 같은 마음으로 다스려진 세상을 이룰 수 있었던 까닭이다.
이 이후부터는 전례(典禮)가 닦아지지 않고 황극(皇極)이 서지 못하여, 상하가 서로 잘 못하고 편당 짓는 풍습이 서로 이어지게 된 것인데, 한(漢) 나라의 남북부(南北部), 당(唐) 나라의 우이(牛李)[1], 송(宋) 나라의 천낙삭(川洛朔)[2], 명(明) 나라의 동서림(東西林)[3] 같은 것이 서로 우환이 되었던 것이다. 당초에는 한 사람의 사의(私意)에서 시작하여 마침내는 반드시 종묘와 사직을 빈 터로 만들고 민생들이 도탄에 빠지게 하였으니, 설령 그 창론자가 살아서는 쫓겨나고 죽어서는 치욕을 받게 될지언정, 아! 이것이 어찌 예전부터 나라를 가진 사람들의 분명한 감계가 아니겠는가? 우리 열성(列聖)들께서 신성하게 왕위를 계승해 왔는데, 선조조(宣祖朝)에 이르러 비로소 조정의 진신(搢紳)들이 동과 서로 명목을 짓게 되었다. 그러나 당초에 또한 일찍이 조정하지 않았던 것이 아닌데, 서로 틀어져버린 발단이 일차로 계미년에 사마(司馬)를 탄핵했을 때 격화되고, 재차 기축년에 역적의 옥사를 다스렸을 때 격화되어 그대로 원수가 되어 틈이 날로 깊어 갔고, 이어 인륜이 무너진 세상이 되어서는 진실로 말할 것이 없게 되었다. 계해년에 중흥하자 종사가 다시 바로잡히고 뛰어난 많은 선비들이 모두 모여들어 거의 보합(保合)의 미덕이 있었다. 그러나 또한 이미 사기(四紀)가 지나자 마침내 기해년의 복제론(服制論)에서 크게 격화되어, 비록 4대의 조정의 명성(明聖)하신 분들께서 인도하며 통솔하셨지만 오히려 모두 평온(平穩)하지 못한 데가 있었다. 하물며 나는 다스리는 일에 어둡고 쓰고 버림에 슬기롭지 못했는데, 장차 어떻게 안정시킬 수 있겠는가? 일찍이 선유(先儒)들이 당파에 관해 훈계한 것을 들으니, 공정하지 못한 짓이라고 하였고, 또한 서로 협조하여 잘못된 것을 숨기는 일은 군자의 마땅히 할 바가 아닌 것이라고 하였다. 비록 사(邪)와 정(正)을 가지고 서로 이름 짓기에 힘쓰고 있으나, 옛적부터 간사한 사람은 올바른 사람을 가리켜 간사하다 하고, 올바른 사람은 간사한 사람을 가리켜 간사하다고 한 것이 어찌 한계가 있겠는가? 그 귀결되는 취지를 요약해 보면 또한 오직 참으로 올바른 사람이 올바르게 되는 법이어서 현명함의 여부가 자연히 구별되는 것이니, 도리어 더할 것이 있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말하자면, 그 당시 지론과 일 처리가 더러 편중된 것이 많아 오직 양편의 의견이 같지 않게 되고, 공사나 사사의 처리가 또한 따라서 합당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먼저 궁리(窮理)하고 거경(居敬)하여 자신을 바로잡지 않고, 남을 간사하다고 지목하며 그것을 정론(定論)으로 인정받으려는 것은 의리에 맞지 않는다. 요컨대, 이제는 각자 피차(彼此)를 섞어서 합쳐야하고 평탄한 마음으로 잘잘못을 논증하기를, 마치 지나간 역사 속의 인물을 논증하듯이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어찌하여 우왕좌왕 허둥지둥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갈며, 기필코 자기의 사사로운 뜻을 실현하려고 갈수록 더욱 격렬해지고 있으니, 어찌 현혹이 심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는 오히려 아랫사람의 근심이고, 임금을 사랑하고 국가에 충성하는 의리가 더욱 이로 인해 버려져서는 안 된다. 갑인년 이래로 세상의 운수가 자주 변해 일진일퇴하며 알력(軋轢)하는 기세를 조장했고, 드디어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피차를 논할 것 없이 각각 편당하는 풍습에 주력하기를 그만두지 않게 만들었으니, 청남(淸南)과 탁남(濁南),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에서 대개를 미루어 볼 수 있다. 매양 생각이 이에 미칠 적마다 마음이 에이는 듯하다. 그 연유를 따져 보면 진실로 허물이 나에게 있는 것이니, 어찌 감히 자신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마는, 미루어 논한다면 또한 편당하는 풍습이 빌미가 되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무릇 임금의 명령을 거행하는 것보다 큰 일은 없는데, 사당(私黨)에 관계되면 임금의 명령도 따르지 않는 경우가 있다. 또한 관리로서 행정보다 중요한 것은 없는데, 사당에 관계가 되면 관리의 행정도 거행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사람 쓰기를 옳게 하느냐 잘못하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없는데, 사당에 관계되면 출척(黜陟)에 공정하지 못한 경우가 있다. 정사의 시비를 논하는 것보다 절박한 것은 없는데 사당에 관계되면 그 되고 안되는 것이 바르지 못한 경우가 있다. 무릇 이는 모두가 강령(綱領)을 세우고 기율(紀律)을 펴며 현명한 사람을 얻어 일을 처리하는 바이다. 그러나 살펴보건대, 편당하는 풍습 때문에 해치지 않는 것이 없어, 차라리 군부(君父)를 저버릴지언정 차마 그 당을 저버리지는 않으니, 다시 어떻게 국가의 급무(急務)를 먼저 하고 사사로운 원수를 뒤로 돌리겠는가? 국사(國事)의 계획과 민중의 근심거리는 서로 까마득하게 잊고 거침없이 모두가 이러고만 있으니, 내가 장차 누구의 힘에 의지하겠는가? 또 서로 처신하는 것을 살펴보건대, 한때 함께 벼슬하고 있으면서도 정의(情誼)가 통하지 못하고 마치 연(燕)나라와 월(越)나라처럼 지내, 충성하고 공경하며 자신을 반성하는 도리는 전혀 없고 매양 원망과 한탄으로 불안해하는 마음만을 가지고 있다. 대소(大小)와 신구(新舊)가 갈수록 서로 사모하며 본받기만 하여, 천 갈래 만 갈래의 짓이 대개 공정함에 등 돌리고 사사로움만 따르는 것이 많다. 중외(中外)의 학교(學校) 선비들에 있어서도 시속(時俗)을 따르며 기세를 타서 제멋대로 배척하고 더욱 끝없이 싸움질하는 곳이 되었으니, 기율이 어그러짐에 따라 그 끼쳐질 폐해는 장차 나라가 나라꼴을 못 갖추어 완전히 뒤집혀 멸망하게 되어도 구원할 수 없는 데 이를 것이다. 그러니 또한 어찌 감히 임금과 신하가 같은 덕과 같은 마음으로 다스려진 세상을 이루게 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아! 심한 일이로다. 또한 알 수 없지만, 조정이나 초야(草野)의 진신(搢紳)과 장보(章甫)로서 능히 이런 풍습을 깊이 싫어하며 개연히 분발하고 쭈뼛하게 마음으로 놀라, 나와 함께 이런 생각을 같이할 사람이 있는가? 몇 년 전에 내가 일찍이 시 한 수를 가지고 조정 신하들을 깨우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로 인해 마음을 고치고 풍습을 바꾼 사람을 들어보지 못했으니, 개탄스러운 일이다. 대저 어찌 조정 신하들만의 잘못이겠느냐? 내가 더러는 희로(喜怒)에 있어서 잘못하고, 더러는 시비에 어두워 진퇴와 출척을 모두 합당하게 하지 못했기에, 성의가 뭇 아랫사람을 미덥게 하지 못하고 교화(敎化)하는 도리가 사람들의 마음에 흡족하지 못한 소치인 것이다. 이제는 장차 크게 사의(私意)를 제거하고 크게 공정한 도리를 회복하기로 온 나라 사람들과 함께 다시 시작하여, 누구나 차별 없이 똑같이 대하고 통렬하게 지난날의 일들을 징계하겠거니와, 피차(彼此)를 논할 것 없이 오직 재질이 있는 사람과 오직 현명한 사람을 높여서 등용해 심복(心腹)처럼 친근하게 의지하고 수족(手足)처럼 중요하게 신임하겠다. 그런 다음에는 상벌(賞罰)하는 법을 반드시 성실하고 반드시 근신하게 거행하되, 혹시 죄 짓는 사람이 있더라도 또한 죄의 경중을 잘 가리어 차례로 용서하여, 거의 공평하고 밝은 다스림을 실현하고 태평한 복을 누리며, 조종(祖宗)께서 이루신 수백 년 된 왕업(王業)을 붙잡고 동서(東西) 수천 리의 민중을 보존하겠다. 대개 하늘이 민생을 낼 적에 군사(君師)를 만들었으니, 신자(臣子)가 된 사람은 망령되이 스스로 괴리(乖離)된 짓을 하여 한 배를 타고 있으면서 딴마음을 가지고 환란을 만들어 나라가 위망(危亡)에 놓이게 해서는 안 된다. 이에 고요(皐陶), 기성(箕聖)의 말과 우(虞)나라, 주(周)나라의 의리에다가 역대의 사적을 참고하고 우리나라의 쌓여 온 폐단을 곁들여 삼가 송(宋) 인종(仁宗) 때에 백관(百官)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붕당(朋黨)의 폐해를 경계한 일을 본떠 한 장의 교서(敎書)를 만들어 군공(群工)을 깨우치고, 또한 장차 공자의 「정직한 사람을 들어 쓰고 굽은 사람은 놓아둔다.」고 한 말과 주자(朱子)의 「현명한지 않은지와 충성스러운지 간사한지를 분별해야 한다.」는 뜻에 배반되지 않게 하려고 하니, 또한 모두들 나의 말을 들어보고 그대들의 심지(心志)를 정돈하고 그대들의 오장(五臟)을 씻어, 사심과 인색에 치우친 소견을 끊어버리고, 오직 국가의 계책과 민생들에 대한 근심을 중요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면, 어찌 좋은 일이 아닐 수 있겠느냐? 혹시라도 사사로움만 생각하여 임금은 잊어버리고 남과 틀어지는 짓을 하기에 힘쓰며 조정에 틈을 만들려 하거나, 혹시라도 편하기만을 도모하고 편당 짓기만을 일삼아 교묘하게 회피하는 짓을 하며 번번이 공부(公府)에 사진(仕進)하지 않으려는 생각만 한다면, 공정하지도 못하고 평순하지도 못하여 나와 더불어 덕을 함께 하지 않으려는 뜻을 단연코 알 수 있으니, 이는 교화(敎化) 밖의 민중과 다를 것 없기에 내가 감히 가볍게 용서하지 않겠다. 아! 그대 신료(臣僚)들은 모름지기 각자 나의 탕탕평평(蕩蕩平平) 한 뜻을 체득(體得)하여 후회함이 없도록 하고, 의정부는 이 말을 중외(中外)에 포고(布告)하여 모두가 듣고 알도록 하라.’는 것으로서의정부개념에 내려 (…)”

巡察使-時崔圭瑞-關內 節到付 議政府頒示中外 戒勿朋黨事 關內 王若曰 予以寡昧 叨守丕基 託于士民之上 夙夜兢惕 未知其所濟 永惟前世致治之道 罔不以君臣同德爲務 其在唐虞三代之際 率由于是 若稽皐陶之言曰 天敍有典 勅我五典 天秩有禮 自我五禮 同寅恊恭 和衷哉 及乎箕子之告武王曰 皇建其有極 斂時五福 用敷錫厥庶民 惟是厥庶民于汝極 錫汝保極 至其群臣 自相同心 則所謂舜命九官 濟濟相讓 周有臣三千 惟一心者 皆是道也 誠以三綱五常之大者 莫尙乎君臣 卑高如天地 恩義如父子 一體如手足[4] 相得如魚水 受命致死 亘萬古而不易 是故 同朝之人 亦有兄弟朋友之義 生同世 學同道 仕同僚 語其交則有親戚故舊之分 語其業則有詩書禮樂之習 語其官 有公卿大夫士之差 不但爲之慕悅親信 又必相與篤愛君忠國之忱 此三代盛時 所以君臣同德而同心 能致其治者然也
自玆以降 典禮不修 皇極不立 上下胥失 黨習相尋 若漢之南北部 唐之牛李 宋之川洛朔 皇朝之東西林 相繼爲患 其始起於一人之私意 終必至於廟社丘墟 生民塗炭 雖其倡論者或不免生罹竄黜死被恥辱 嗚呼 此豈非千古有國之明鑑哉 惟我列聖 聖繼神承 式至于宣廟朝 始有朝紳東西之目 初亦未嘗不爲之調劑 至其相失之端 一激於癸未之劾司馬 再激於己丑之治逆獄 仍成讐怨 釁隙日深 繼値斁倫之世 固無足道焉 及乎癸亥中興 宗祊再正 群彦畢集 庶幾有保合之美 而亦旣四紀 遂乃大激于己亥服制之論 雖以四朝之明聖導率 猶有未盡底平者 況予之昧於御涖 眩於用舍者 將何以靖之
嘗聞先儒訓黨曰 不公 又曰 相助匿非 非君子之所當爲者 雖其務以邪正相命 然自古邪人指正人謂邪 正人指邪人爲邪者 何限 要其歸趣 亦惟眞正者爲正 賢否自別 抑何益之有哉 由此而言 其於當時持論處事 或多偏重 只是兩邊意見之不同 公私處置 又從而失其宜耳 不先窮理居敬以正己 而指人爲邪 認爲定論 殊無義理 要之 到今 各當參合彼此 平心論證其得失 如往史中人物 可也 又何爲汲汲遑遑 怒目切齒 必售其私意 愈往而愈激 容非惑之甚者耶 然此猶是在下之患 至於愛君忠國之義 尤不當因此而廢格
粤自甲寅以來 世運屢變 一進一退 適足以助其傾軋之勢 遂使當時治史者 亡論彼此 各主黨習而不已 淸濁老少 槪可推見 每念及此 心焉若傷 究厥所由 寔予有咎 其何敢自恕乎 推而論之 亦莫非黨習之爲祟 夫莫大於行君之令 而涉於私黨 則君令有或不從焉 莫重於莅官之政 而涉於私黨 則政官有或不行焉 莫要於用人之藏否 而涉於私黨 則黜陟有所不公焉 凡此皆所立經陳紀 求賢而制事者 觀無不以黨習而害之 寧負君父而不忍負其黨 更何有於先國家之急而後私讎耶 以至國計民憂 置之相忘之域 滔滔皆是 予將誰賴焉 且以相處者視之 雖同仕一時而情義不通 有若燕越 全無忠敬自反之道 每懷怨恨不安之心 大小新舊 轉相慕效 千塗萬轍 率多背公而循私 以及中外學校之士 因時乘勢 肆行斥罰 益成鬪䦧之場 罔有紀極 其流之弊 將至於國不爲國 顚覆殄滅而莫之恤 又安敢望君臣同德而同心 以致其治者耶 噫嘻甚矣 未知朝廷之上 草野之間 薦紳章甫之倫 其有能深疾此習 慨然發憤 怵焉驚心 與予同此懷抱者耶 旣往之事 予嘗以一詩 曉喩朝臣 然尙未聞因此而革心移風者 是爲悼歎 夫豈徒朝臣之咎 無非予或失喜怒 或昧是非 進退黜陟 俱不得宜 誠意未孚於群下 化理未洽於人心 以致之耳
今將大祛私意 大恢公道 與國更始 一視同仁 痛懲前日之事 無論彼此 惟才惟賢 是崇是用 托以心腹之親 任以手足之要 然後繼以賞罰之典 必誠必謹 以至雖或有罪者 亦可辨其輕重 次第開釋 庶幾以臻公明之理 以享和平之福 以保祖宗數百年基業 以保東西數千里民庶 蓋天降生民 作之君師 爲其臣子者 不宜妄自乖離 致有同舟異心之患 而使宗國阽於亂亡 玆以皐陶箕聖之言 虞周君臣之義 參以歷代之跡 與夫我朝之積弊 謹依宋仁宗時詔百官戒朋黨之擧 作爲一書 以諭群工 抑將毋背于孔聖擧直措枉 朱子分別賢否忠邪之旨 其亦咸聽予言 整頓爾心志 洗滌爾腸胃 俾絶私吝偏滯之見 而惟國計民憂是主 豈不善哉 豈不善哉 其或懷私忘上 務爲崖異 必欲生釁於朝著 或圖便事黨 巧爲回避 每思不仕於公府 其不公不平 不欲與予同德之意 節然可知 是無異於化外之民 予不敢輕貸 咨爾臣隣 須各仰體予蕩蕩平平之志 庶無後悔 惟爾政府 其以此言 布告中外 咸使聞知事 下政府□

























주석[ ]

  1. 당(唐) 나라 목종(穆宗)에서부터 무종(武宗) 때까지 서로 당(黨)을 만들어 다툰 우승유(牛僧孺)•이종민(李宗閔)과 이길보(李吉甫)•이덕유(李德裕) 부자를 가리키는 말.
  2. 중국 송(宋) 나라 철종(哲宗) 무렵의 세 당파로, 천은 소식(蘇軾)ㆍ여도(呂陶) 등의 천당(川黨), 낙은 정이(程頤)ㆍ주광정(朱光庭) 등의 낙당(洛黨), 삭은 유지(劉摯)ㆍ유안세(劉安世) 등의 삭당(朔黨)을 가리킴.
  3. 명대(明代)의 당파인 동림당(東林黨)과 이의 반대파인 서림당(西林黨).
  4. 승정원일기에는 ‘首足’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