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40807

jiam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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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4년 8월 6일 甲戌년 癸酉월 壬寅일, 양력 1694-09-25 1694년 8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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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4년 8월 7일 임인
七日 壬寅
맑음
宋武去
정(鄭) 생(生)인물이 왔다.
鄭生來
저녁 무렵 비가 내렸다.
向夕雨

유모의 행적에 대한 기록
【유모의 손자 대까지는 공선(貢膳)개념을 받지 말고, 또한 잡아다 사환(使喚)개념하지 말라. 그 후소생(後所生)은 몇 대가 지나도 결코 외손들에게 분급하지 말라. 이렇게 함으로써 내 지극한 마음을 알 수 있도록 하라】
나는 유복자로 태어나 겨우 4일 만에 어머니마저 잃어, 할머니 윤(尹) 부인인물께서 산자리에서 거두어 품안에 두시고 젖이 나오는 비(婢)를 골라 젖을 먹였으니, 이 사람이 곧 나의 유모로, 그 이름은 복생(福生)노비이다. 유모는 함경도 홍원(洪原)공간 출신이다. 어릴 때 할아버지께서 밥 짓고 물 길어 부엌일 하는 종으로 삼았다. 유모가 되자 자신의 남편과 아이도 버려두고 밤낮으로 나를 잠시도 떠나지 않으며 젖 먹여 기르는 일에만 일심으로 정성을 다 했으니, 이 어찌 무식한 천민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나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해 오래 살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왼쪽 뺨에 바둑알만한 붉은 점이 있었는데, 때때로 크게 부풀어 오르며 붉은 두드러기가 왼쪽 얼굴 전체에 가득 퍼지면서 두통과 구역질이 나다가, 사나흘 후 퍼졌던 두드러기가 수그러들며 기력을 되찾곤 했다. 이런 증상이 한 달에도 몇 번이나 일어났고 그 밖의 질병도 계속 끊이지 않았는데, 12살 때 천연두개념를 앓은 뒤 붉은 점이 영영 사라지고 몸 상태도 조금은 안정되었다. 이런 까닭으로 10살 전에는 가는 실처럼 위태롭게 목숨을 이어가며 아침에 저녁 일을 보장하기 힘들 지경이어서, 약을 유모에게 마시게 하고 그 젖을 나에게 전하여 먹이곤 했으니, 그 간의 고생이란 실로 감당키 힘든 것이었다. 그런데도 유모는 지성으로 애쓰며 조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고, 남편이나 아이에 대한 염려 한마디조차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심지어 자기가 낳은 아이가 젖을 먹지 못해 죽었는데도,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는 윤 부인께서 엄히 단속한 때문이긴 하나, 천성에서 나온 지성이 아니라면 어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겠는가? 유모는 부드럽고 공손한 성품은 아니어서, 동료들과 지내거나 윗사람을 섬기는 일은 잘 하지 못하곤 했다. 그러나 나를 보살피고 기르는 일만큼은 살갑게 은혜를 다하여 친자식이나 다름없이 했으니, 이 어찌 우리 조상들의 영혼이 말없이 도와 유모의 마음을 깨우쳐 그렇게 하도록 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아, 가슴 아프다.
나는 8살이 되어서도 유모의 젖을 먹었고, 13살에 할아버지 슬하에 가서 배우기 시작하면서 그 품을 벗어나게 되었다. 갑오년(1654년)에 혼인하였고, 다다음해에는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는데, 유모는 아내와 함께 거처하며 집안일을 주관하면서 마음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을묘년(1675년)에 나는 식구들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 때 유모에겐 만년에 얻은 딸이 하나 있었는데, 유모가 차마 헤어질 수 없다며 그대로 머물러 남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나는 그 뜻을 거스를 수 없어 허락했다. 내가 떠나고 그는 남아 헤어질 때가 되자, 유모는 거의 혼절할 듯이 통곡했고 마음을 상한 나머지 병을 얻었다. 병은 점점 깊어 위중해졌고, 나를 그리워하는 말을 끊임없이 하다가 홀연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곧 그해 6월 15일이었다. 나와 유모가 각자의 사정 때문에 멀리 떨어져 지낸지 몇 달 지나지 않아, 갑자기 부음이 이르러 살아서 헤어진 것이 사별이 되어 버렸으니, 나로 하여금 영원토록 가없는 애통함을 품게 하였다. 이는 기구하고 박복한 내 운명 때문에 나와 유모가 끝내 서로 의지하며 천수를 누릴 수 없게 된 것이다. 아아, 애통하도다!
유모는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어 태어난 해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죽은 해에 머리가 아직 반백이 되지 않았으니, 60세는 넘지 않았을 것이다. 유모의 딸은 이름이 가지개(加知介)노비이며 황원(黃原)공간 당포리(唐浦里)공간에 솔거(率居)하고 있어, 유모를 그곳에 장사지냈다. 유모가 아플 때 약을 주어 구하지 못했고, 장사지낼 때 묻을 곳을 살펴 매장하지 못했으니, 이것이 더욱 평생의 아픔이 된다. 내가 유모의 은혜를 갚지 못한 채 그녀를 잃었으니, 그 딸의 신역(身役)개념을 영원히 면제해 주고자 한다. 또한 그 죽은 날에 찬물(饌物)을 갖춰 주어 제사지내게 하고, 가끔은 우리 집에서 몸소 지내며 곡하였으면 한다.
소과(小科)와 대과(大科)에 오른 후 나는 고향 농장에 내려와 있었는데, 정언(正言)개념으로 임금의 부름을 받게 되어 선영(先塋)에 인사하고 나서, 유모의 무덤에도 제사상을 차려 성묘하여 유모의 혼을 위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저승은 아득하니 애통한 슬픔만 더할 뿐이다. 계속하여 아이들을 시켜 내가 하던 대로 하게 하여 그만두지 않도록 할 것이나, 과연 내 뜻을 준수할 수 있을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아아, 내가 의지할 데 없이 태어나 유모가 마음을 쏟아 고생과 정성으로 길러 주었음을, 내가 지금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자손 그 누가 알겠는가! 그래서 위와 같이 약술하여 후손들에게 보이노라.
갑술년(1694년) 7월 그믐, 눈물을 훔치며 기록하다

乳母事實
【限母之孫 勿爲徵捧貢膳 亦勿捉致使喚 後所生 雖至累代 切勿分給於外孫 以體吾至意】
余以遺孤生 才四日又失所恃 祖母尹夫人 收之稿席之間 納之懷抱之中 擇婢子之有乳者而哺之 卽我乳母 福生其名也 乳母乃北關洪原人也 稚幼時 王親置諸爨汲之列 及以乳用 棄其夫與子 晝夜不敢蹔離 一心敬謹於飼乳保護之事 此豈無識下流之所易爲也
余自落地 氣質甚孱 若將澌盡 左臉有赤點如碁子 有時熾盛 赤暈遍滿於半面 則輒頭疼嘔逆 三四日後 赤暈之遍滿者收 而氣方甦 一月之內 如是者數 其他疾恙 連仍不已 至十二歲 經痘之後 赤點永祛 神氣稍定 以此之故 十歲之前 氣息綿綴 若難保朝夕 惟以藥物飮之母而傳乳之 其間勞苦 實所難堪 而母至誠服勤 少無憚厭之色 夫與兒之念 一未嘗發於口 至於所生之兒 失乳而死 而亦無怨懟之言 雖是尹夫人嚴束之故 而非其至誠出於天 安能若是 母性不柔遜 在醜奉上之際 頗有不相能者 而至於撫我育我 曲盡恩意 無異天鍾 豈我先靈默佑 喩其衷而使之然哉 嗚呼痛矣
余年八歲 猶飮其乳 十三就王親膝下 始受學 乃免其懷 甲午余娶婦□來 翌明年祖母棄背 乳母率婦而居 左右管攝 無不盡心 乙卯余捲率上京 母晩有一女 不忍相離 切願落留 余重違其意而許之 及至去留之際 母痛哭幾絶 仍感傷成病 轉至危境 戀我之言 不絶於口 而奄忽長逝 卽其年六月十五日也 余與母 各拘於事 千里相離 未數月 而凶音遽至 作死別於生離 使我永抱無涯之痛 此亦緣余之生道奇薄 使母與余 不得畢竟相依 以終其天年也 嗚呼痛哉
母早離其母 不識其生年 而臨死之年 髮未半白 想未過周甲也 母之女 加知介爲名者 率居于黃原唐浦里 仍葬其地 母病 余不得執藥救護 母葬 又不得審地埋窆 此尤平生之痛也 余無以報母恩而喪 余意永蠲其女身役 且於亡日 備給饌物而祭之 或於吾家 躬行而哭之
余登大小科 下來鄕庄 及以正言承召也 展拜先塋 亦於母墳 設奠省掃 庶可以慰母之魂 而九原冥漠 徒增傷痛 仍敎兒屬 依我爲之 俾不替焉 而未知果能遵吾意否也 嗚呼 我生之零丁 母心之勤苦 我今不言 子孫其誰知之 略述如右 以示後昆 歲甲戌孟秋之晦 抆淚而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