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40216

jiam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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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4년 2월 15일 甲戌년 丁卯월 甲申일, 양력 1694-03-11 1694년 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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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4년 2월 16일 갑신
十六日 甲申
흐리다 맑음
陰陽
파산(波山)공간의 선조(先祖) 좌통례(左通禮)인물와 조비(祖妣) 숙인(淑人) 송씨(宋氏)인물묘표(墓標)물품가 오래되어 새로 바꾸는데, 문중(門中) 사람들이 나에게 사실을 기록하고 갈(碣)물품의 음기(陰記)를 쓰라고 했다. 내가 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는데도, 문중에서 억지로 시켜 부득이 세계(世系)와 자손록(子孫錄)을 간단히 기록하였다. 탈고한 글에 대해 문중과 뜻이 서로 맞지 않았다. 세미(世美)인물 씨(氏)와 윤징귀(尹徵龜)인물 등 몇 사람의 뜻이, 자손이 천 명이 넘어 모두 다 기록할 수 없으니 현달한 사람만 기록하여 선조를 빛내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갈문(碣文)을 짓자, 귤정공(橘亭公)인물 이하 현달한 사람은 모두 우리 파였다. 그래서 문중에서 마침내 꺼리면서 말하기를 “무과(武科) 급제자로 현달한 사람이 없지 않은데, 수록하지 않으니 불평하는 말이 많다.”고 했다. 그런데 선대에 무과도 없는 파에서는 말하기를, “문무(文武)로 현달한 사람을 모두 드러내어 기록하면, 우리 가문에 인재가 없다는 것이 더욱 두드러진다.”고 하며, 화를 내었다. 내가 그 말을 듣고 즉시 원고를 버리고 사용하지 않았다. 사이가 벌어지고 싸우는 일이 생길까 걱정해서였다. 세미인물 씨가 개탄을 그치지 않으며, 내가 지은 글을 간략히 산삭하고 무과로 현달한 사람들을 추가로 기록하여 문중의 뜻에 맞춤으로써 내가 지은 글을 반드시 쓰이게 하고자 했으나, 생략이 너무 심하여 문장이 되지 않고 게다가 문중의 뜻에도 부합하지 않았다. 이 일은 조상을 위한 중요한 사업으로 구차하게 해서는 안 되고, 구차히 한다면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단지 두 표석(標石)물품의 앞면만 써 줬다. 우리 가문의 일에 이와 같은 경우가 많다. 부끄러운 일이다. 통탄스러우나, 무슨 수가 있겠는가. 선조고(先祖考)인물의 표석 앞면에 “증 통훈대부 통예원 좌통례 윤공 사보의 묘(贈通訓大夫通禮院左通禮尹公思甫之墓)”라 쓰고, 왼쪽 귀퉁이에는 “숭정 갑신 후 오십일 년 갑술 삼월일 팔대 손 정언 이후 쓰다(崇禎甲申後五十一年甲戌三月日改立八代孫正言爾厚書)”라고 썼다. 조비(祖妣)인물의 표석 앞면에는 “증 숙인(贈淑人)에 송씨(宋氏)의 묘”라고 쓰고. 년(年) 월(月)은 위와 같이 썼다.
波山先祖左通禮及祖妣淑人宋氏墓標年久易新 門中之人 使我記實書碣陰 余以不似辭則門中强之 不獲已略具世系及子孫錄 旣脫稿 門中之意皆不恊 蓋世美氏及尹徵龜數三人之意 則以爲子孫過千 不爲盡載 只錄顯人以光祖先 及碣文旣構 則橘亭以下顯人皆吾派 故門中遂有忌意 乃曰不無武達而不載 多有不平之言 至於先代武科亦無之派則曰 文顯武達 皆表章而書之 則吾輩之無光益著 亦有慍意 余聞之卽棄稿不用 蓋慮有乖亂之擧也 世美氏慨然不已 就吾所構者 刪而略之 添入武科之人 以悅門中之意 爲必用之計 而略之太過 文不成理 門中之意且不歸順 余以爲此乃爲先重事不可苟且 不如不爲之爲快也 只書兩標石前面而歸 吾門之事多如此 不可使聞於他人 痛歎奈何 先祖考標石前面書曰贈通訓大夫通禮院左通禮尹公思甫之墓 左隅書曰崇禎甲申後五十一年甲戌三月日改立八代孫正言爾厚書 祖妣標石前面則曰贈淑人宋氏之墓年月同上

좌통례(左通禮) 갈문(碣文)
증(贈) 통훈대부(通訓大夫) 통예원(通禮院) 좌통례(左通禮) 윤공(尹公)은 휘(諱)가 사보(思甫)이고 해남인(海南人)이다. 휘 존부(存富)가 공의 비조(鼻祖)다. 그 후손은 광혁(光奕), 형(衡), 효정(孝正), 천집(川楫), 환(桓), 녹화(祿和)【진사(進士)이며 잠(岑)으로 이름을 고쳤다】, 광전(光琠), 단학(丹鶴)【군기소윤(軍器少尹)】인데, 이것이 그의 세계(世系)다. 소윤(少尹)이 공을 낳았다. 공은 증 숙인(淑人) 송 씨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는데, 종(種), 경(耕)【병조참의에 추증됨】, 무(畝), 조유정(曺有井)이다. 종은 4남 1녀를 낳았는데, 신운(莘耘), 신우(莘佑), 신흥(莘興), 신함(莘咸), 김처수(金處守)다. 경은 7남을 낳았는데, 효인(孝仁), 효의(孝義), 효례(孝禮), 효지(孝智), 효상(孝常), 효원(孝元), 효정(孝貞)이니, 효정이 곧 어초은(漁樵隱)이다. 어초은은 상상(上庠)에 올랐으나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고,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아들 구(衢)는 문과에 올랐으며 홍문관 응교를 지냈다. 호는 귤정(橘亭)이고 기묘명현(己卯名賢)이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항(衖)은 생원이고, 행(行)은 문과를 거쳐 목사(牧使)를 지냈다. 복(復)은 문과에 급제하고 충청도관찰사를 지냈다. 좌통례(左通禮)와 숙인(淑人)의 봉증(封贈)은 바로 관찰사의 추은(推恩)이다.[1] 응교(應敎)의 아들 홍중(弘中)은 문과에 올라 예조정랑을 지내고 예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의중(毅中)은 문과에 올라 이조정랑과 독서당을 거쳐 좌참찬에 이르렀다. 목사 행의 손자 광계(光啓)는 문과에 올랐으며 예조정랑을 지냈다. 좌참찬의 아들 유심(唯深)은 음사(蔭仕)로 관직에 올라 예빈시 부정을 지냈고, 유기(唯幾)는 문과에 오르고 강원도관찰사를 지냈으며 홍중의 후사가 되었다. 부정(副正)의 아들이 선언(善言)과 선도(善道)다. 선도는 문과에 올랐고 예조참의를 지냈으며, 유기의 후사가 되었다. 그는 광해군 때 포의(布衣)로서 항장(抗章)을 올려 권간(權奸) 이이첨(李爾瞻)을 죽이길 청하였고, 현종조(顯宗朝) 때 또 상소하여 인선왕후(仁宣王后)가 효묘(孝廟)를 위해 기년복을 입는 것이 잘못되었음을 말했다. 그리고 송시열(宋時烈)이 예를 그르친 죄를 저질렀음을 논하여 전후로 귀양살이한 것이 거의 수십 년이지만, 나라의 예가 바로잡힌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며 아들로는 인미(仁美), 의미(義美), 예미(禮美)가 있다. 인미는 문과에 올랐으나 충헌공이 의례(議禮) 문제로 시배(時輩)의 미움을 받았기 때문에 금고(禁錮)로 생을 마쳤고 후에 헌납(獻納)에 추증되었다. 아들 이석(爾錫)이 있는데, 음보관(蔭補官)으로 전부(典簿)를 지냈다. 의미는 진사에 합격했으나 일찍 죽었다. 선언의 후사가 되었고 아들로는 이구(爾久)와 이후(爾厚)가 있다. 이후는 예미(禮美)의 후사가 되었는데, 바로 불초(不肖)다. 내외자손(內外子孫)은 그 수가 천 명이 넘어 모두 실을 수 없다. 세상에 드러난 자들만 거론하여 조선(祖先)의 자손을 드러냈을 뿐, 무과에 오른 자와 외손 중 빼어난 자들에 이르러서는 모두 적지 않고 간략하게 기록한다. 아! 샘이 깊은 물은 물길이 반드시 길고, 뿌리 깊은 나무는 가지와 잎이 반드시 무성하며, 덕이 두터운 사람은 자손이 반드시 창성한다. 이는 필연적인 이치다. 지금 자손들의 번성과 빼어남을 살펴보니 좌통례가 쌓은 덕의 두터움을 알만하다. 이치를 속일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세대가 멀어지고 친진(親盡)한 뒤에 향불이 오랫동안 끊어졌다가, 기축년(1649년)에 충헌공이 건의하여 내외자손이 쌀과 포를 각출하고 또 제전(祭田)을 마련하여 돌아가면서 유사를 정해 일을 맡고 매해 9월 보름에 종인(宗人)들을 데리고 제사를 지냈다. 조상을 기리고 은혜를 갚으려는 마음은 이로써 다했으나, 비석이 오래되고 글자가 닳아서 종인들이 새것으로 바꾸기로 결정하고 불초에게 길이 남을 전기를 쓰도록 부탁했지만, 불초가 어찌 감히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글재주가 없다고 사양했다. 종인들이 “당세에는 진실로 불후의 글을 지을 사람이 없고, 또 이 묘지(墓誌)는 자손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 중요하므로 남에게 부탁할 수 없다.”고 아주 완강하게 강요했다. 사양하다가 하는 수 없어 위와 같이 약술한다.
숭정(崇禎) 갑신 후 51년 갑술(1694년) 3월일 8대손 조봉대부 사간원 정언 이후(爾厚)가 삼가 글을 짓고 쓰다.

左通禮碣文
贈通訓大夫通禮院左通禮尹公諱思甫海南人也 有諱存富卽公之鼻祖也 其後曰光奕 曰衡 曰孝正 曰川楫 曰桓 曰祿和 進士改名岑 曰光琠 曰丹鶴 軍器少尹 此其世系也 少尹生公 公娶贈淑人宋氏 生三男一女 曰種 曰耕贈兵曺參議 曰畝 曰曺有井 種生四男一女 曰莘耘莘佑莘興莘咸金處守 耕生七男 曰孝仁孝義孝禮孝智孝常孝元孝貞卽漁樵隱也 登上庠隱德不仕贈戶曺參判 有子曰衢文科弘文館應敎號橘亭卽己卯名賢贈吏曺判書 曰衖生員 曰行文科牧使 曰復文科忠淸道觀察使 左通禮淑人之封贈乃觀察使之推恩也 應敎有子曰弘中文科禮曹正郞贈禮曹判書 曰毅中文科歷吏郞書堂至左參贊 牧使孫光啓文科禮曹正郞 左參贊有子曰唯深蔭仕禮賓副正 曰唯幾文科江原道觀察使爲弘中後 副正有子曰善言 曰善道文科禮曹參議爲唯幾後 光海時以布衣抗章請誅權奸爾瞻 顯宗朝又上䟽言仁宣王后爲孝廟服朞之非 仍論宋時烈誤禮之罪 前後竄謫殆數十年 及邦禮旣正贈吏曹判書 諡忠憲 有子曰人美義美禮美 仁美登文科 坐忠憲公議禮見忤於時 禁錮終身後贈獻納 有子曰爾錫以蔭補官典簿 義美擧進士早沒爲善言後 有子曰爾久爾厚 爾厚爲禮美後卽不肖也 內外子孫其數過千 不能盡載 只擧著顯於世者 以見祖先之餘慶 至於武科及外孫之文達者 並不錄以約文 嗚乎 源遠之水 派流必長 根深之木 枝葉必茂 德厚之人 子孫必昌 此必然之理也 今觀子孫之蕃延貴達 左通禮積德之厚可知 理之不可誣者 有如是夫 旣代遠親盡之後 香火久絶 在己丑歲 忠憲公建議 喩內外子孫各出米布 且置祭田 輪定有司而掌之 每歲季秋之大望 率宗人而祭焉 報本追遠之意 於斯盡矣 而繫牲之石年久字頑 宗人相議易新 仍屬不肖以不朽之傳 不肖何敢當乃以不文辭 則宗人曰當世固無立言者 而今此墓誌貴出子手 不必乞諸人 强之甚固 辭不獲已 遂略述如右 崇貞甲申後五十一年癸酉三月日 八代孫朝奉大夫司諫院正言爾厚謹識仍書石

숙인(淑人) 송씨(宋氏) 묘갈문
증 숙인(淑人) 송 씨는 증 좌통례(左通禮) 윤사보(尹思甫) 공의 배필이다. 자손이 번성하고 용모가 눈부시니 해남 윤 씨의 대비(大妃)다. 좌통례께서 쌓으신 덕이 두터운 것을 여기서 볼 수 있으나, 또한 어찌 숙인의 훌륭한 덕으로써 이룬 것이 아니겠는가. 오호, 위대하도다! 당초의 묘표가 훼손되어 숭정 7년(1634년) 현손 유익(唯益)이 새로 세웠지만, 그 후 세월이 오래 되어 자획이 마모되었기에 여러 후손이 또 새 돌을 다시 세운다. 자손의 이름은 좌통례 묘갈의 음기에 기록되어 있어, 여기에 다시 쓰지 않는다. 세운 연월일도 좌통례의 묘갈과 같다.

淑人宋氏碣文
贈淑人宋氏 卽贈左通禮尹公諱思甫之配也 子孫重盛 冠冕煥焃 海南尹氏之大妃 此左通禮積德之厚 於此可見而 亦豈非淑人懿德之盛 有以致之也 嗚呼偉哉 當初墓標致傷 崇禎七年玄孫唯益改立 厥後年所旣久 字畫刓缺 諸孫又改新石而 子孫錄載左通禮碣陰 此不復述云 年月同上

























주석[ ]

  1. 윤복이 충청도관찰사가 되면서 법전의 규정에 의거하여 그 품직에 따라 1573년(宣祖6) 9월 29일에 증조부 윤사보가 좌통례로 추증되고 증조모 송 씨가 숙인으로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