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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3년 3월 29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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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3년 3월 28일 | 癸酉년 丙辰월 癸酉일, 양력 1693-05-04 | 1693년 4월 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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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3년 3월 29일 계유
二十九日 癸酉
비가 올 듯하다가 오지 않음
欲雨不雨
堂山黃世輝崔尙馹於坪尹時相後村鄭光胤來
○나주(羅州)공간 목사(牧使)개념 허지(許墀)인물가 부의로 무명물품 3필, 장지(狀紙)물품 2권, 황촉(黃燭)물품 2쌍, 조기(石魚)물품 5속(束), 말린 숭어물품 5마리를 보냈다.
○羅牧許墀送賻木三疋狀紙二卷黃燭二雙石魚五束乾秀魚五尾
○해남서원(海南書院)공간 별유사(別有司)인 나주(羅州)공간의 나만운(羅晩運)인물, 광주(光州)공간의 안여상(安汝相)인물, 함평(咸平)공간의 정만시(鄭萬始)인물, 남평(南平)공간의 최세익(崔世益)인물이 내려왔다. 사당을 건립하는 일로 윤허를 받은 지 이미 4년인데 아직도 공사를 시작하지 못하고 있는 까닭은 우리 고을 유사(有司)인 박필중(朴必中)인물, 임중헌(任重獻)인물, 박수귀(朴壽龜)인물, 이장원(李長原)인물, 박세표(朴世標)인물, 임익성(任翊聖)인물 무리가 일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해남(海南) 현감(縣監) 류상재(柳尙載)인물는 조금도 돌아보지 않고, 전 관찰사개념 이현기(李玄紀)인물, 홍만조(洪萬朝)인물는 대강 분부만 내리고 또한 시행하지 않았다. 그 후 이봉징(李鳳徵)인물은 궤변을 늘어놓으며 유생상서(儒生上書)에 대해 뎨김을 내렸을 뿐, 애초부터 받아들여 처리하지도 않았다. 광주(光州)공간, 남평(南平)공간 등 여러 고을의 많은 선비들이 회의를 하여, 다만 본읍(本邑)의 유사(有司)한테만 맡겨서는 완성될 기약이 없으니, 여러 고을에서 별유사(別有司)를 택하여 정해서 그들로 하여금 공사를 감독하게 하자고 했다. 현 관찰사개념 박경후(朴慶後)인물가 여러 고을 유생상서를 보고서 소상히 엄한 뎨김을 내렸고 또한 수령을 문책하니, 이 때문에 나만운(羅晩運)인물 무리 4명이 와서 역사(役事)를 지시하고 간 것이다.
○海南書院別有司羅州羅晩運光州安汝相咸平鄭萬始南平崔世益下來 蓋建祠事蒙允已四載 而尙不能始役 本邑有司朴必中任重獻朴壽龜李長原朴世標任翊聖軰 不能經紀所致 而主倅柳尙載絕不顧見 前方伯李玄紀洪萬朝 畧有分付 而亦不施行 其後李鳳徵以詭辭論題儒生上書 而已元不聽理 光州南平等列邑多士會議 以爲只任本邑有司 則無可成之日 擇定列邑別有司 使之董役 今方伯朴慶後因列邑儒生上書縷縷嚴題且責主倅 故羅晩運軰四人來到 指畫役事而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