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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7년 11월 2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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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7년 11월 20일 | 丁丑년 壬子월 丁酉일, 양력 1698-01-02 | 1697년 11월 2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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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7년 11월 21일 정유
二十一日 丁酉
맑음
陽
여명(黎明)에 출발하여 간두리(幹頭里)공간에서 아침을 해먹었다. 박선교(朴善交)인물가 산소를 살펴보고 말하기를 “이 땅은 지나치게 좁으나 자못 귀격(貴格)이 있고 용세(龍勢)도 미약하지만 형국이 온화하여 등급을 논하자면 차하(次下)보다 낫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태하(太下)에 혈을 쓰면 생왕지기(生旺之氣)를 이을 수 없어 필시 발복(發福)하기는 어려울 것이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내 고비(考妣)의 묘가 두 무덤 사이에 있는데 이것이 소위 양귀결시(兩鬼挗屍)개념[1]여서 옛사람들이 크게 꺼리는 것이었다. 이에 박선교인물는 고비 묘 위로 10장 쯤 되는 곳에 새로운 혈을 천점(扦點)하고 나무를 꽂아 표시를 하고서는 속히 묏자리를 옮길 것을 청하였다. 듣자 하니 몹시 걱정되었다. 향(向)을 봉수산(烽燧山)공간으로 쓰면 기운을 잃을 것이니 내안산(內案山)개념의 일자문성(一字文星)개념[2]을 안대(案對)개념[3]로 하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黎明發 朝炊幹頭里 審視山所曰 此地過峽 頗有貴格 龍勢亦嫩 形局蘊藉 若論等第 則優可爲次下 但用穴太下 不能承接生旺之氣 必不能發福 極可惜也 且 吾考妣墓間於兩墓之間 此所謂兩鬼挗屍 古人所大忌 仍扦新穴於考妣墓上十丈之許 揷木以標 請速移奉 聞來極可悶慮 向則用烽燧山甚失之 不如以內案一字文星爲對云云
계속 가던 길을 향해 좌일(佐一)공간에 도착하였다. 북쪽 언덕에 올라 묘향(卯向)으로 혈을 점찍고 (박선교인물가) 말하기를 “이곳은 노룡희주(老龍戱珠)개념 형국입니다. 참으로 귀격(貴格)이니 삼하(三下)의 등급이라 할 만합니다. 용이 쥔 구슬은 바다 가운데 주먹만 한 작은 섬공간입니다.”라고 하였다.
仍向前路 到佐一 登北隴上 點卯向之穴曰 此是老龍戱珠 眞貴格 可爲三下 珠如一拳小島在水中
논정(論亭)공간에 도착하여 사정(射亭)공간 뒤쪽의 고개에 올라 이른바 '사정등(射亭登)'을 보고 (박선교인물가) 말하기를 “이 땅은 꽤 좋으니 결코 버려서는 안 됩니다. 안산개념은, 축봉(丑峰)으로 삼으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到論亭 登射亭後嶺 見所謂射亭登曰 此地頗好 決不可捨 案則以丑峰爲之云
【간두(幹頭)공간에 점찍어 둔 혈은 지나치게 낮은 것이 흠이다. 그러나 가을에 낙엽 지는 것까지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높게 점지하면 발복(發福)이 필시 적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幹頭點穴過低是欠 而秋敗非所慮 高點則發福必不少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