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90719(윤달)

jiam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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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9윤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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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9년 윤7월 18일 己卯년 壬申월 乙卯일, 양력 1699-09-12 1699년 윤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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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9년 윤7월 19일 을묘
十九日 乙卯
맑음
倉監李雲栽鄭光胤李棘弟大休來
○작년에 합장암(合掌庵)공간이 중창된 후 내가 한번 올라 완상한 적이 있는데,[1] 그 비범하고 괴이하며 맑고 깨끗한 경치가 좋았다. 선방에서 하룻밤 머물며 이전에 다하지 못한 정취를 이어서 누릴 마음을 항상 갖고 있었으나, 바쁜 일에 얽매여 실천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난번 벗 안형상(安衡相)인물이 편지를 보내 “좋은 달이 이지러지기 전에 합장암(合掌庵)공간으로 가서 하룻밤 자는 어떻겠습니까?”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신이 나서, 마침내 오늘 며느리와 의논하여 찹쌀떡물품【소위 인절미】 한 그릇을 만들고 복숭아물품도 따서 창사(倉舍)공간로 갔다. 안형상인물이 여기서 모이자고 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안형상인물이 야비(倻婢)노비 둘을 데리고 왔다. 창촌(倉村)공간에 사는 김련화(金鍊華)인물가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와서 만났는데,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라고 하기에, 내가 “보리 몇 말을 꾸러 왔네.”라고 하자, 좌중이 모두 웃었다.
○昨年合掌庵重創之後 余一登賞 愛其奇怪淸淨 常有一宿禪房 以續前日未盡之懷 而冗故縻人 卒卒未果矣 頃者安友送言曰 欲趁好月未虧 往宿合掌如何 余喜其能起余 乃於今日議諸婦造粘餠【所謂人切味】一器 且摘桃子 進至倉舍 蓋安期會於此也 須臾安携倻兩指而來 倉村居金鍊華聞余來 來見曰 何爲而來臨此地乎 余曰 欲得糶牟數斗而來 座中相笑
곧장 안형상인물과 함께 뒤쪽 고개공간를 넘었다. 서유신(徐有信)인물의 집 앞에 이르자, 안형상인물이 여기서 잠시 쉬면서 서유신인물에게 소찬을 부탁해놓고 가자고 했다. 안형상인물이 급작스레 이번 행차를 나서게 되어 미처 소찬을 준비해오지 못한 것 같았다. 형편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유신인물 형제가 곧장 나와 우리를 맞이하여, 집 울타리 밖에 앉아 몇 마디 나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卽與安友踰後峙 到徐有信家前 安請蹔憩于此 以要徐家薄蔬而去 槪想安猝作此行 未及措盤蔬而來 其勢似然 余勉頷之 徐之兄弟卽出迎 坐于籬外 數語而起
잠시 후 합장암공간 아래에 도착하니, 절을 지키고 있던 중 몇 명이 바위틈에 있는 위태로운 잔도(棧道)를 통해 아래로 내려와 앞에서 절했다. 인간 세상에서 볼 수 없는 그 광경이 너무 좋았다. 즉시 윗도리를 벗고 중들을 따라 나아갔다. 층층 바윗길을 몸을 구부려 오르고 걸음걸음 험한 곳을 디디며 공중에 가로 놓인 외나무다리를 건너 암자에 앉아 사방을 둘러보니, 온통 삐쭉삐쭉 솟은 암석이라 자리 하나 놓을 땅, 한줌의 흙도 없다. 큰 바위는 몇 길인지 모를 정도로 깎아지른 것처럼 우뚝 솟았고 작은 바위는 몇 길 혹은 한 길 정도의 높이였는데, 마치 검과 창을 묶어 세워 놓은 것과 같아 그 모습을 이루 형용할 수가 없다. 조물주의 조화는 정말 헤아릴 수 없다. 암자의 굴 또한 기이하여 조물주의 오묘한 솜씨를 더욱 잘 볼 수 있는 곳이다. 작년 9월 초에 쓴 유람기가 있어, 여기서는 다시 췌언하지 않는다. 암자 사방의 바위는 모두 험준하고 가팔라 사람이 붙잡고 오를 만한 길이 전혀 없다. 오직 암자 앞의 나무다리로만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데, 밤이 되면 즉시 중들이 다리를 들어 올려 왕래할 수 없게 하니 진실로 병화(兵火)를 피할 수 있는 곳이다. 구경을 끝낸 후 물품복숭아물품를 내어 먹으며 암자의 중들과 여러 (…) 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 요리(料理)가 주도면밀하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이는 경포대(鏡浦臺)와 같은데 (…) 술을 마시지 않으니, 눈 앞 가득히 맑은 술이 펼쳐져 있다 해도 이 물건의 절실함만 못하다.”라고 했다. (…)
俄到掌庵下 守僧數人從巖隙危棧而下來 拜于前 已喜其景狀 非人世間有也 卽脫上衣隨僧而進 層層跼登 步步履危 渡橫空一木杠 坐庵軒 環顧四面 無非矗矗巖石 無一席地一肉土 大巖則壁立不知幾仞 小巖之高數丈或一丈 宛如束立創劍 不可形容 造化翁所爲信莫測也 庵之窟亦奇異 尤可見化工之妙處也 已載於昨年九月初遊記 此不復贅 而庵之四傍巖角 峭峻危絶 頓無人之攀緣之路 唯以庵前木橋 堇堇通行 夜則庵僧卽擧橋 使不得往來 眞避兵之所也 ■■旣畢 出餠與桃啖之 且散給庵僧 及諸■■■■ ■■卒料理可謂周密矣 余曰 此如鏡浦臺 ■■■■不飮 雖有滿眼淸醥 不如此物之切實■
문장(門長)인물 댁으로 심부름꾼을 보내 적동(笛童) 사선(士先)인물을 불러 오게 했다. 거문고물품피리물품를 함께 연주하는 것도 흥취를 도울 만하나, 무한한 맑은 경치가 고요하게 바라보며 말없이 마주한 가운데 모두 들어오니 속물들의 악기 소리는 모두 물리치는 것이 낫지만, 남에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잠시 어울리며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送伻門長宅 招致笛童士先者 絲竹並奏 亦足助興 而無限淸景 盡入於靜觀默對之中 俗物之啁啾 不如一倂除却 而不可容易語人者 姑且酬酢而任之
저녁 무렵 서유신인물 형제가 적각(赤脚, 계집종)개념 한 명을 데리고 왔는데, 소찬을 가지고 온 것이다.
向暮徐之兄弟率一赤脚而至 蓋爲持蔬饌而來也
밤에 바위에 느긋하게 앉아있으니 먼 포구에는 고기 잡는 불빛들이 별처럼 흩어져 반짝이는데, 더욱 아름다운 경치였다. 엷은 구름이 하늘을 덮어 달이 비치지 않다가 밤이 깊어지자 구름이 걷히고 달빛이 훤해졌다. 달빛에 사방의 산이 하얗게 빛나 마치 눈이 내린 것 같다. 멈출 줄 모르고 완상하다가 거의 한밤중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청량하고 상쾌한 기분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옛 사람이 읊은바 “뼈 시리고 혼이 맑아 잠 못 이루네[骨冷魂淸無夢寐]”다.[2]
乘夜久坐巖上 遠浦漁火 燦如星散 尤是奇玩 而薄雲蔽天 月光未透 夜久雲消月明 四山皓白 正如雪漲 賞玩不知止 幾至夜半乃就寢 而淸凉蕭爽 不能成睡 古人詩所謂骨冷魂淸無夢寐者也























주석[ ]

  1. 관련 내용은 1698년 9월 3일 일기에 나온다.
  2. 한유(韓愈) 「도원도(桃源圖)」 “달 밝은 밤 이끌려서 텅 빈 옥당에 묵었더니,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뼛골은 오싹 정신은 청랑.[月明伴宿玉堂空 骨冷魂淸無夢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