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81230

jiam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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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8년 12월 29일 戊寅년 乙丑월  庚午일, 양력 1699-01-30 1699년 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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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8년 12월 30일 경오
三十日 庚午
바람 불고 맑음
風陽
정(鄭) 생(生)인물이 숙위했다.
鄭生宿

올해 농사에 보리물품물품황증(黃蒸)개념이 특히 심했다. 계유년부터 5년 간 쭉 대흉작이 생긴 뒤에 보리와 밀의 흉작도 이미 3년째여서 사람들이 모두 불안해하며 세상이 끝날까 싶었는데, 다행히도 기장물품물품가 조금 익은 덕분에 겨우 연명할 수 있었다. 7월에 이르러서는 남서풍[坤申風]이 갑자기 거세져서 충재(蟲災)를 초래하니, 기장과 조로 버틴 목숨을 간신히 올벼물품로 조금 연명하였다. 늦벼물품는 처음엔 풍작이 될 모양이었지만 결국에는 시들어서 낫을 댈 수가 없는 곳이 매우 많았다. 목화물품도 처음엔 우거졌으나 마지막엔 열매를 맺지 못했다. 통틀어 말하자면 1년 안에 세 번이나 흉황(凶荒)을 만난 셈이니, 사람들이 뭘 믿고 살아간단 말인가? 채과(菜果)도 잘 익지 않고 어산물(魚産物)도 매우 비싸져서 벼 한 말로 어린 숭어[童魚]물품 3마리를 겨우 살 정도이니, 그렇게 되면 수륙의 물산(物産)이 모두 고갈된 것이다. 게다가 역병이 한양에서 시작되어 팔도로 번져 사망자들이 꽤 많았는데, 사람들은 오랑캐 곡식[胡穀]이 원인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는 사실 시운과 관계된 것으로 하늘이 장차 생령들을 모조리 죽이고야 말 것이니, 말해봐야 어쩔 수 있겠는가. 역병이 창궐하여 한양에서는 봄부터 지금까지 더욱 심해졌고 지방은 가을이 되자 비로소 발병하였는데, 역병에 걸린 사람은 모두 상놈이고 양반은 거의 없다고 한다. 부지런히 일하느라 지친 몸이 굶주림에 상한 탓에 병에 쉽게 전염되어 그렇게 된 것인가? 한양에는 죽은 사람이 무수하여 날마다 시신을 가득 싣고 나가는 달구지가 끊이지 않고 쭉 이어진다고 한다. 이는 우리나라가 건국된 이래로 있지 않았던 변괴이니 장탄식을 하게 만든다. -조정에서 특별히 매장감관(埋葬監官)개념과 역군 및 수레를 지정해서 날마다 시신을 싣고 나가지만 미처 다 수습하지는 못하여 길가에 시체가 여전히 많다고 한다.-
올 여름은 더위가 이상하여 무오년보다 줄지 않았고 비도 부족하지 않았는데, 농사가 오히려 잘 되지 않았다. 하늘이 한 일이니 어찌하랴.

今年之事 兩麥黃病特甚 自癸酉連五年 大凶之餘 兩麥之失稔 亦已三年 人皆遑遑 大命將止 奉賴黍粟之稍熟 堇得延命 至七月坤申風猝緊 仍致蟲災 艱以早稻稍延黍粟後命脈 而晩稻則初有豐登之勢 而末乃病損不得掛鎌處甚多 木花亦初茂 而晩無實 ■■言之則一年之內 三値凶荒 人命何以聊生 至於菜■亦不成 魚産甚貴 一斗之租 堇貿童魚三介 然則水陸之産俱匱竭矣 而加之以癘疫自京而下 蔓延八路 死亡頗多 人言胡穀所祟 而此實時運所關 天將盡劉生靈而後已 言之奈何 癘疫之熾 京中則自春及今轉甚 外方則秋後始發 而所患皆常漢 兩班則絶稀云 勤勞之體 餓餒之傷 病氣易染而然耶 京中死者無算 日以牛車滿載屍身而出 絡繹不絶云 此乃國朝以來所未有之變也 令人長歎-朝家特定埋葬監官役軍及車 逐日載尸以出 而未及盡收 路上尸體猶多云-
今夏暑熱異常不減 於戊午雨水亦非不足 而年事猶不成 天實爲之 奈何

곽선완(郭善完)인물이 말하길 “무인(戊寅)년은 운기가 폐금(肺金)이어서 객운에 견제를 받고, 기묘(己卯)년은 비토(脾土)여서 객기에 견제를 받는다. 전염병이 봄에 더욱 성행하지만 가을 뒤로는 가라앉을 수 있다. 그러나 역병과는 다르게 그 병증이 두통과 요통이 나거나 사지가 아프고, 8일이 지나면 열이 내리거나 두 세 차례 아프고 나서 낫는다. 불환금정기산(不換金正氣散)물품을 미리 복용하여 예방하되, 한창 아플 때는 가감불환금정기산(加減不換金正氣散)물품을 복용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郭善完言戊寅年運氣肺金 受制於客運 己卯則脾土 受制客氣 時疾春間尤盛 入秋節後 可以寢息 然而異於癘疫 其症或頭痛腰痛 或四肢痛 八日而退熱 或痛數三次而愈 預服不換金正氣散以防之 方痛 服加減不換金正氣散云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