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81011
jiamdiary
1698년 10월 11일 | ||
← 이전 | 다음 → | |
1698년 10월 10일 | 戊寅년 癸亥월 壬子일, 양력 1698-11-13 | 1698년 10월 12일 |
태그숨기기
원문이미지보기
1698년 10월 11일 임자
十一日 壬子
흐림
陰
○성덕기(成德基)인물가 함평(咸平)공간에 무과(武科)를 보러 가는 길에 들렀다. 성덕기는 지난달 겨우 모친상 재기(再期)가 지났는데 이번 행차를 한 것이다. 내가 “막 재기가 지났는데 이렇게 행차를 하니 과연 어떤지 모르겠네.” 라고 하자 성덕기가 말하기를, “별진(別珍)공간의 (김(金) 상(相)인물)께 여쭤보았는데, 이미 재기가 지났으니 비록 벼슬을 한들 안 될 게 없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과거에 응시하는 것은 벼슬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부모를 모시는 사람이라면 더욱 과거를 그만둘 수 없으니 이번 관광(觀光)개념[1]이 무엇이 불가하겠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재기 후에 벼슬에 나아가는 것은 이미 서울에서는 통용되고 있는 예입니다.”라고 했다. 또한 성(成) 생(生)은 초기(初期)에 외제(外除)개념[2]하여 백의(白衣)물품·백대(白帶)물품·백립(白笠)물품을 입었고, 제3월[3]에 묵최(墨衰)물품[4]를 입었는데, 이 또한 별진(別珍)공간의 (김(金) 상(相)인물)께 품의하여 행한 것이다. 부친이 살아있고 어머니 상을 당했을 때 이렇게 하는 것은 요사이 이미 통용된 예(禮)가 되었다. 초기 후에는 즉시 궤연을 철거하는데 오직 이 부분만큼은 성 생인물이 따르지 않았다. 초기 때 외제하고 백의를 입고 궤연을 철거하는 것은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예를 행하게 된 데에는 반드시 근거한 바가 있을 것이니, 내 감히 시비를 논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 집은 선세(先世)부터 준행해 온 것이 단지 《주자가례문헌》에 의거하여, 부친이 살아있을 때 어머니 상을 당하면 초기에 외제하여 묵최(墨衰)물품를 입고, 재기에는 백의물품를 입으며, 제3월에 담사(禫祀)개념를 지낸다. 성 생인물이 행한 예는 어떠한 것인지 참으로 모르겠다. 비록 이존(貳尊)개념[5]하는 의리가 없으므로 초기에 외제한다고 하지만, ‘상은 3년간 애달피 슬퍼해야 한다’는 원칙으로 말할 것 같으면 겨우 재기가 지나자마자 과거 보러 가는 것은 예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정리(情理)로도 차마 하지 못하는 바이다. 옛 사람들이 담제(禫祭)개념를 만든 뜻은, 대상(大祥)개념 후에도 효자의 마음이 여전히 편안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달 건너 담제를 지내는 것 중월이담(中月而禫)개념[6]이며, 담제개념는 담담하게 편안한 마음이 되고자 하는 뜻이다. 담제를 지내기 전에는 효자의 마음이 아직 평안하지 않으니 어찌 차마 보통 사람처럼 태연히 과거에 응시할 수 있겠는가. 예의 본뜻에 어떠한지는 모르겠으나 어리석은 내 견해는 이와 같다. 그러므로 대략 이런 내용으로 성 생인물에게 말해주었더니, 성 생 역시 머쓱해했지만 중간에 그만둘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대로 시험장으로 향했다.
○成德基赴咸平武科歷訪 成也前月才過母喪再期 而作此行 余曰才過再期 此行未知如何 成曰嘗稟於別珍 則以爲 旣經再基[7] 雖仕宦無所不可 況赴科異於仕宦 奉親之人 尤不可廢科 今此觀光 有何不可 吾於再期後供仕 已有洛下通行之例云云 且成生於初期外除 着白衣帶白笠 第三月乃着墨衰 此亦禀於別珍也 父在母喪如是爲之者 已作近世通行之禮 初期之後 卽撤几筵 而唯此一款 成生不遵焉 初期外除 着白撤几筵 未知昉於何人 而行此禮者 必有所據 余不敢是非 而吾家則自先世遵行者 只依朱子家禮 父在母喪初期外除着墨衰 再期着白 第三月行禫祀 如成生所行之禮 實未知其如何也 雖以無貳尊之義 初期外除 而以喪三年哀慽之意言之 則才過再期 旋赴科場 非徒於禮殊常 於情實有所不忍者矣 古人制禫之義 大祥之後 孝子之心 猶所不寧 故中月而禫 禫者 澹澹然平安之意也 未禫之前 孝子之心 猶未平安 則何忍晏然赴擧自同平人哉 未知禮意如何 而愚陋之見如此 故以此意略言於成生 則成亦憮然 而不能中止 仍向試邑 吾言亦不能自信 聊述如右 以爲他日質疑於好禮之君子云
○참판(參判)개념 이옥(李沃) 문약(文若)인물[8]이 일찍이 상주(尙州)공간 고향집에 내려와 지내다가 뜻밖에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벗들이 세상을 떠나 마침내 여기에 이르게 되었으니, 슬프고 슬프다.
○聞李參判文若【沃】曾下尙州鄕居 意外奄忽 朋儕之凋零 一至於此 慘矣慘矣
金別將歸蓮洞
박세유(朴世維)인물가 와서 만났다.
朴世維來見
○좌우에 뜸 각 20장을 떴다.
○灸左右各二十壯
【다시 생각해 보니, 초기에 외제(外除)개념하고 제3월에 담사(禫祀)개념를 지내므로 재기 후에는 다시 상복을 입거나 담사를 지내는 예가 없는 것이니 재기 후에 과거에 응시해도 불가할 것이 없을 듯하다. 종합하여 말하자면, 요사이 행해지는 예는 거의 단상(短喪)개념[9]에 가깝다. 그러니 끝내 의심스러운 마음이 없을 수는 없다.】
【更思之 初期外除 第三月行禫祀 故再期後無更服禫之禮 則再期後赴科 似無不可 而總而言之 則近世所行之禮 近於短喪 終不能無惑焉】
주석[ ]
- ↑ 관광(觀光): 『주역(周易)』 관(觀)괘 육사(六四)의 효사인 “나라의 빛남을 보다(觀國之光)”에서 나온 말로서 원래 도성이나 대궐에 들어가 문물을 구경함을 가리키는 말이다. 조선시대에는 흔히 과거 시험을 보러 가는 것을 가리켰다.
- ↑ 외제(外除): 상복을 벗음. 『예기(禮記)』 「잡기(雜記) 하」에 “어버이의 상에는 외제하고 형제의 상은 내제한다(親喪外除 兄弟之喪內除)”라는 구절이 있다. ‘외제’는 어버이의 상을 당해서 아직 내면의 슬픔이 남아있더라도 기한이 차면 예법에 따라 외면의 상복을 벗는 것을 말하고, ‘내제’는 외면의 상복을 아직 벗지 않았어도 내면의 슬픔이 점차 감소되는 것을 말한다.
- ↑ 초기 다다음달을 가리킴.
- ↑ 묵최(墨衰): 베 직령에 묵립과 묵대를 갖추어 입는 상복.
- ↑ 이존(貳尊): 양쪽을 대등하게 높임
- ↑ 대상 후 다다음달에 담제를 지내는 것.
- ↑ 基: ‘期’의 잘못.
- ↑ 이관징(李觀徵)의 첫째 아들. 본관 연안(延安). 이관징의 누이는 윤이후의 형인 윤이구(尹爾久)의 처다.
- ↑ 단상(短喪): 3년상을 1년으로 줄여 지내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