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51204

jiam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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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5년 12월 3일 乙亥년 己丑월 壬辰일, 양력 1696-01-08 1695년 1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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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5년 12월 4일 임진
四日 壬辰
맑음
윤희정(尹希程)인물, 최형익(崔衡翊)인물, 임성좌(林聖佐)인물가 왔다. 임성좌(林聖佐)인물는 구림(鳩林) 사람인데 윤선경(尹善慶)인물의 생질이며, 윤이우(尹陑遇)인물의 사위다.
尹希程崔衡翊林聖佐來 林卽鳩林人 而尹善慶之甥姪 尹陑遇之女壻也
극인(棘人)개념 윤석귀(尹碩龜)인물가 왔다.
尹棘碩龜來

〈죽부초려기(竹阜草廬記)〉 및 시(詩)[1] 【시는 위에 있다. ‘간(干)’ 자 운(韻) 두 수이다.】[2]
해남(海南)공간의 남쪽에 화산(花山)공간이 있고, 화산 아래에 작은 섬이 있는데, 그 모양이 누운 소와 같고 동서로 300보가 채 되지 않으며 남북으로는 겨우 100여 보다. 예부터 온 섬에 대나무가 무리지어 나 있으니, 섬 이름을 ‘죽도(竹島)공간’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과거 경인년(1650년)에 창녕 성씨 성준익(成峻翼) 공(公)인물이 처음으로 섬의 동쪽과 서쪽 모퉁이에 제방을 쌓아 육지와 연결된 땅으로 만들어 섬의 남쪽 기슭에 거처했다. 그 뒤 38년이 지난 정묘년(1687년) 큰 흉년이 들어 성(成) 공(公)인물이 이를 팔아 구명(救命)하고자 하여, 내가 육지의 땅과 바꾸었다. 성(成) 공(公)인물은 서울의 명망 높은 집안 출신인데, 이곳까지 흘러와 살며 우리 집안사람인 윤상은(尹相殷)인물의 데릴사위가 되었다. 죽도는 원래 윤상은(尹相殷)인물의 소유였다가 성(成) 공(公)인물이 장인에게 얻은 것이다. 그것이 흘러흘러 마침내 나에게 귀속되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사물엔 각기 주인이 있는 법”이라는 게 아니겠는가? 당초 내가 이곳을 얻으려 하자, 육지와 섬을 맞바꾸려는 것을 가지고 물정 모른다고 모두들 나를 비웃었으나, 내가 홀로 사람들의 의견을 배척하고 결단을 내렸다. 만일 내 뜻이 넓은 토지에 있었다면, 어찌 이런 일을 했겠는가? 이 섬의 풍광이 호남에서 나란히 할 곳이 없다는 점을 높이 산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명도(明道) 정호(程顥)의 시에서 “옆 사람은 내 마음을 모른다.”라는 것이다.[3]이 섬을 얻은 후 나는 계속 서울에서 머물러 있었고, 멀어서 경영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임신년(1692년) 함평(咸平)에서 귀향한 후 먼저 제방에 흙을 채워 속을 보강하고 돌을 그 위에 얹어 입혔다. (…) 그리고 수문을 새로 만들었다. 장차 차츰 집을 세우려 했는데, 상(喪)이 그치지 않아 (…) 정자를 세워 왕래하며 쉴 곳으로 삼으려 했다. (…) 그런데 또 흉년이 들어 굶어죽을 걱정이 아침저녁으로 닥쳤으니, 어찌 생각이 여기에 미칠 수 있었겠는가? (…) 무한한 경치가 8, 9년 동안 버려진 땅이 되어버렸으니, 나는 초심을 저버렸을 뿐 아니라, 호산(湖山)마저 저버린 것이다. 아아! 나의 산수를 좋아하는 성벽은 실로 타고난 것인데, 반평생을 조정에서 보내며 속세를 실컷 맛보았으니, 이는 사람이 제 산수를 만나지 못한 것이다. 이 섬은 중간에 주인이 몇 번 바뀌면서도 단지 평범한 사람들만 머무르는 곳일 뿐이었으니, 이는 산수가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이제 뜻밖에 내 소유가 되었으니, 이는 조물주의 안배인 듯하며, 사람과 산수가 서로 만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산수가 제 사람을 만났으니 사람에겐 산수를 만난 즐거움이 있어야 하는데, 내가 자연을 제대로 꾸미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이는 산수는 사람을 저버리지 않았으되 사람이 산수를 저버린 것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이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우선 정자 터 서쪽에 초당을 지었다. 좋은 재목을 쓰지도 않고 인력을 많이 쓰지도 않고 완성했으니, 쉽게 생각한 것이다. 집의 구조는 동서로 세 칸을 세워 반으로 나누어 동쪽은 방으로 삼고 서쪽은 부엌으로 삼았다. 그리고 서쪽으로부터 가로로 한 칸을 질러 방(房)을 만들어 심부름하고 수직(守直)하는 종이 쓸 곳으로 했다. 손방(巽方)을 향해 집을 세웠으니 밝고 훤하여 아름답고, 북쪽을 등지고 자리 잡았으니 안온하여 편안하다. 앞으로는 세 봉우리가 수려하게 솟아 있고, 뒤로는 옹암(甕巖)공간이 듬직한 진산(鎭山)이 되어있다. 그밖에도 검푸른 작은 산들이 사방으로 죽 늘어서 있어 어느 하나 완상할 만하지 않은 것이 없다. 큰 내가 두륜산공간에서 발원하여 어성포(漁城浦)공간에 이르고, 다시 섬의 뒤를 빙 둘러 흘러 바다로 흘러든다. 징의도(澄意島)공간가 큰 내의 하구를 가로 질러 막고 있고 부소도(扶蘇島)공간가 그 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그 남쪽이 곧 죽도이다. 세 섬이 둘러싼 가운데가 큰 호수와 같은 바다가 되는데, 둘레가 10여 리가 된다. 만조가 들어차면 수면이 거울처럼 맑게 비치고, 물이 빠지면 한 가닥 띠와 같은 긴 강이 된다. 초당(草堂)에서 북쪽으로 50여 보를 올라가면 섬의 꼭대기이다. 이곳에 오르면 아래에 있는 큰 강과 호수와 같은 바다에 침을 뱉을 수 있을 정도이며, 훨훨 나는 갈매기, 해오라기와 지나가는 배들을 모두 눈 아래 둘 수 있다. 또한 어성포(漁城浦)공간의 긴 다리와 송호(松湖)공간의 낮은 언덕, 사점(沙店)공간의 촌락, 해창(海倉)공간의 큰 배들을 모두 낱낱이 가리키며 볼 수 있어, 그 천태만상이 그림을 보는 것 같이 또렷하니, 잘 모르겠으나 중국의 동정호(洞庭湖) 경치와 이곳 중 어느 쪽이 낫고 어느 쪽이 못할까? 초당에서 보이는 남쪽 산들의 여러 모습과 동쪽 바다의 3분의 1을, 뜰을 나서지 않고도 앉아서 마주할 수 있어 늙음이 장차 이르는 것도 알지 못하게 하니, 정말로 이른바 늙지 않고 오래 누릴 경치이다. 그리고 어부들이 그물을 던져 아침저녁으로 고기를 잡고, 게며 조개는 마치 풀 줍듯 하니, 이는 섬의 별미이다. 채원(菜園)에서는 토란과 밤이 나니 가난은 면할 수 있으며, 정원에는 소나무물품대나무물품가 있으니 속됨은 면할 수 있고, 밭에서는 면화물품가 나니 추위는 막을 수 있으며, 제방의 논에서는 향기 좋은 물품를 얻을 수 있으니 굶주림은 채울 수 있다. 이런 것들 덕택에 섬에서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다. 그 가운데 흰 머리 늙은이가 아무 생각도 걱정도 없이 마치 바보 천치처럼 살면서, 손님이 오면 웃으며 기쁘게 맞이하고, 흥이 이르면 거문고에 맞춰 노래 부른다. 지팡이 짚고 물고기를 바라보기도 하고, 물가로 산책 나가 갈매기와 벗하기도 하며, 유유자적 느긋하게 걱정 없는 갈천씨(葛天氏)의 백성이 되었다. 어떤 사람이 이름을 물으니, 늙은이는 빙그레 웃으며 “늙어서 잊어버렸다오.”라고 대답하였다나.
을해년(1695년) 12월 상순 죽부산인(竹阜散人) 지옹(支翁) 쓰다.

竹阜草廬記 幷詩 【詩現上卽干字韻兩首也】
海南之南有花山 花山之下有小島 其狀如臥牛 東西不盈三百步 南北僅百餘步 古有叢竹遍生于島 島之得名以竹 蓋以此云 往在庚寅之歲 昌寧成公峻翼甫 築島之東西隅而爲堰 遂成連陸之地 仍居于島之南岸 後三十八年丁卯 歲大侵 成公欲斥賣 爲救死之計 余以陸庄易之 成公蓋洛下望族 而流寓是邑 贅于吾宗人尹相殷 島乃尹之舊物 而成公得之于其聘翁者也 轉輾流傳 終歸於余 此所謂物各有主者非耶 當初余之圖占也 人皆笑余以陸換海之迂 而余獨排衆議而決之 余之意若在廣田 則豈爲是也 蓋取島之勝賞湖中無偶也 此政明道詩傍人不識余心事者也 余旣得此之後 長在洛下 遠莫能經紀 逮夫壬申 自咸歸田之後 先就堰堤 補土而實其築 負石而衣其上 ■■■■ 頭改作水門 將次第爲結構之事 而遭憂未 ■…■ 準擬營立亭榭 以爲往來偃息之所 而非但孤■…■ 歲又凶歉 阻飢之患 迫在朝夕 何暇念及於外■■■ 無限風光 任作八九年閑棄之地 非徒負我初心 其負我湖山 何如也 噫 余之樂山樂水之癖 實是天所赭 而半世東華喫盡塵土者 人不遇物也 此島之中間屢易主 只爲尋常人依止者 物不遇人也 今旣不期而爲我所有 則似亦有造物者安排 而可謂人與物相遇也 物旣遇人 則人當有遇物之樂 而余不能粧點湖山 以至今日 則可謂物不負人 人自負物也 余有愧乎此 先構草堂于亭基之西 蓋材不擇良 役不煩人 完就 易之也 堂之制 自東而西立三間 而分其半 東爲房 西爲竈 從西而橫架一間爲房 以爲使喚守直之所 向巽而建 明朗可愛 背北而坐 蘊藉可便 三峰聳秀於前 甕巖鎭峙於後 其他翠黛螺鬟 羅列於四面 無非可玩 大川發源於頭輪之山 達于漁城之浦 袞袞纏繞乎島之背 而入于大海 澄意島橫塞海口 扶蘇島控其北 而其南卽竹島也 環其中 成一大湖 周回可爲十餘里 潮滿 則鏡面澄澈 汐退 則便作一帶長江 自草堂北上五十餘步 卽島之巓也 登臨乎此 則長江大湖 可以俯唾 鷗鷺之飛 檣帆之過 皆在眼底 漁城之長橋 松湖之短阜 沙店之村落 海倉之舸艦 亦在指點之中 千形萬狀 依然若畫圖之看 未知中州之洞庭 果與此孰優孰劣也 堂之所見得 南之山衆態 東之海三之一 不出戶庭 坐臥相對 殆令人不知老之將至 眞所謂難老之境也 若夫漁人網子 朝暮打魚 若蟹若蛤 拾取如芥 此則島之滋味也 至於園 有芋栗 未全貧也 庭有松竹 可免俗也 田收白綿 可禦寒也 堰取香稻 可充飢也 此則島之活契也 中有鶴髮翁 無思無慮 若愚若癡 客來則開歡而笑 興至則和瑟而歌 或倚杖而觀魚 或步渚而狎鷗 悠悠然 浩浩然 作無懷葛天氏之民 人或問其姓名 則翁菀爾而答曰 老而忘之云
歲乙亥季冬上浣 竹阜散人 支翁書

























주석[ ]

  1. 같은 내용의 문서가 한국고문서자료관 사이트의 ‘해남윤씨 고문서’에 실려 있다. 이 문서의 경우는 난초(亂草)로 쓰여 있으며, 앞부분이 탈락되어 있고, 뒤에 '차이아제세운(次二兒除歲韻)' 및 발문이 있다.
  2. 시는 1695년 10월 21일, 1695년 10월 23일 일기에 실려 있다.
  3. 《이정문집(二程文集)》 권1 '우성(偶成)'에 “雲淡風輕近午天 望花隨柳過前川 旁人不識予心樂 將謂偷閒學少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