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50910

jiam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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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5년 9월 9일 乙亥년 丙戌월 己巳일, 양력 1695-10-17 1695년 9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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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5년 9월 10일 기사
十日 己巳
흐리다 맑음. 빗발이 잠시 뿌림
陰陽 雨脚乍洒
나는 흥아(興兒)인물, 과원(果願)인물, 지원(至願)인물, 우원(又願)인물, 그리고 집안사람들과 함께 뒷산에 올랐다가 발길을 돌려 송백동(松栢洞)공간에 갔다가 돌아왔다.
吾與興兒果願至願又願及家內人登後山 轉抵松栢洞而還
정동(貞洞)공간<Term id="M582" name="참군">참군(參軍)인물 외숙</Person>과 이대휴(李大休)인물 종(從)이 서울공간에서 내려와 점심을 먹고 백치(白峙)공간로 돌아갔다.
貞洞參軍渭陽及李從大休自京下來 點心後歸白峙
윤시상(尹時相)인물, 윤익성(尹翊聖)인물, ■■■이 왔다.
○尹時相尹翊聖■■■來
윤기업(尹機業)인물이 와서 우이도공간에 들어갈 것이라고 해서, 편지를 써서 부쳤다.
尹機業來言 將入牛耳島 裁書以付
○들으니, ■■■ 대궐의 귀신의 변괴가 예사가 아니라 주상인물께서 이현궁(梨峴宮)공간[1]으로 이어(移御)하고 병까지 나시니 ■■■ 걱정이 이루 말할 수 없다. 또 들으니, 달아난 물품성균관공간에 들어갔다가 마침내 대성전(大成殿)공간에 이르렀는데, 전에 갑인년, 경신년, 기사년 등의 환국 때도 모두 이런 변고가 있었다고 한다. 정말 가슴 서늘한 일이다.
○聞■■大闕鬼變非常 上移御梨峴宮 違豫■■■憂 可勝爲言 且聞逸馬入成均館 遂至於大成殿 曾在甲寅庚申己巳換局之時 皆有此變云 良可寒心
작년에 내가 '변명서(辨明書)'[2]를 지어서, 어초은(漁樵隱)께서 금남(錦南)에게 가르침을 받았다는 설은 잘못 전해진 것이라고 했다. 그 후 《금남집(錦南集)문헌》에 있는 류(柳) 미암(眉巖)이 지은 행장을 보고서야, 세간에 전하는 것이 잘못 되지 않았고 〈사마재선생안(司馬齋先生案)〉문헌에 잘못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선생안이 전란에 불탔는데, 수습하여 수정할 때 연도와 합격 순서가 잘못되었을 것이다. 이제 미암이 지은 금남 선생의 행장을 아래에 옮겨 써서 상고할 자료로 삼는다.

금남선생(錦南先生) 최(崔)공 휘(諱) 부(溥)인물는, 자가 연연(淵淵), 나주인(羅州人)이며, 진사 휘(諱) 택(澤)의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자질이 남달라 심지가 굳고 영민했으며, 장성해서는 경전 공부와 문장 짓기에서 당시의 사람들 가운데 으뜸이었다. 24세에 진사시 제3등으로 뽑혔다. 29세가 되던 성화(成化) 임인년(1482) 봄, 성종께서 알성(謁聖)하고 인재를 뽑을 때, 공은 대정통책(對正統策)으로 제3등에 등제했다. 상사(上舍)가 되어 성균관에 머물면서 재주와 이름을 크게 떨쳤고, 신종호(申從濩) 등과 벗이 되었다. 처음 벼슬하여 조정에 서고 여러 관직을 거쳐 전적이 되었다. 《동국통감(東國通鑑)》문헌을 찬수하는 데 참여하여, 백 수십 항목의 논(論)을 지었는데 명백하고 적확하여 당시의 여론으로부터 크게 칭찬받았다. 병오년(1486) 중시(重試)에서 2등으로 뽑혀, 사헌부 감찰에서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고 오래지않아 수찬으로 승진했다. 정미년(1487) 부교리로 승진하고 9월에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제주에 갔다. 홍치(弘治) 무신년(1488) 윤1월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황망히 바다를 건너다가 역풍을 만나 중국의 태주(台州)에 표류했다. 6월에 한양 청파역(靑波驛)으로 돌아와 임금의 명령을 받고 《표해록(漂海錄)》문헌을 지어 올렸다. 그 뒤 연이어 모친상을 당했고, 임자년(1492) 정월에 탈상하여 지평에 제수되었다. 간관들이 전날 초상을 당했을 때 임금의 명을 받고 표해록을 지은 일을 허물삼고 논박했으나, 임금께서는 그 논의가 너무 심하다고 여기고 선정전(宣政殿)으로 나아가 인견하시고 표류한 전말을 물으셨다. 공이 상세히 임금께 아뢰자, 임금께서 “그대가 사지(死地)를 돌아다니며 나라를 빛내었도다!”라고 탄복하시며 옷 한 벌을 내려 주셨다. 이 해에 서장관으로서 북경에 갔다.
계축년(1493) 봄에 세자시강원 문학이 되었으며, 4월에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사헌부에서 또 이전의 논의를 끄집어내자, 홍문관의 여러 학사들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최아무개는 4년 동안 계속 상중에 있으면서도 한 번도 집에 못 가긴 했지만, 효행이 빼어나니 원컨대 동료로 함께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했다. 성종은 공경(公卿)과 의논하여 마침내 교리를 내려주었다. 5월에 병으로 체직되어 승문원 교리가 되었다. 갑인년(1494) 정월 다시 홍문관 교리가 되었고, 8월에 부응교 겸 예문관 응교로 승진했다. 예문관의 극선(極選)[3]이었는데, 장차 문형(文衡)이 될 사람이 아니라면 극선에 들 수 없다. 을묘년(1495) 봄 생원회시의 참고관(參考官)이 되어 사람들에게 명성을 얻었다. 병진년(1496) 5월 호서 지역이 크게 가물자 연산군은 선생에게 가서 수차의 제작을 가르치도록 명했고, 9월에 이르러 돌아왔다. 11월 상례(相禮)를 거쳐 사간이 되었다. 정사년(1497) 2월 태묘(太廟)에 부제(祔祭)를 지낸 뒤, 공이 소를 써서 극렬하게 연산군의 실정을 간했고, 또 공경대신들을 통렬히 꾸짖었다. 이달에 좌천되어 다시 상례가 되었고 질정관으로 북경에 갔다가, 돌아와서 가을에 예빈시정이 되었다. 모두 권세가의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7월 사화가 일어났다. 공과 신종호 등 여덟 명은 글을 지어 점필재 김종직에게 평가를 받았던 적이 있었는데, 연산군이 집을 수색하도록 명령했을 때 공만 홀로 《점필재집(佔畢齋集)》문헌을 집에 간직하고 있다가, 심문을 받고 장을 맞았으며 단천으로 유배되었다. 공은 적소에 이르고 나서도 처신이 너그럽고 평온했다. 갑자년(1504) 10월 연산군이 의금부의 옥으로 잡아오라고 명령했다. 사형을 당하기 전날 밤, 김전(金詮)과 홍언필(洪彦弼) 등이 가벼운 죄로 옥에 갇혀 함께 있었는데, 술로써 전별하자 선생은 일일이 술을 받아 마셨다. 기약 없는 이별에도 정녕 정신과 낯빛이 흐트러지지 않았고, 자신만만한 모습이 평상시와 같았다. 공이 경태(景泰) 갑술년(1454)에 태어났으니, 이때가 51세였다.
정덕(正德) 병인년(1506) 중종께서 나라를 안정시키시자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로 추증되었다. 선생은 책을 널리 읽어 뛰어나게 해박했는데 《주역》에 특히 조예가 깊었다. 힘써 후진을 가르치고 이끄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해남현은 구석진 바닷가에 치우쳐 있어서 예부터 문예와 학문이 없었고 예의 또한 거칠고 비루했다. 선생이 이 고을에 장가들어 여러 해 노닐며 정론(正論)으로 비루한 풍속을 바꾸었다. 또 윤효정(尹孝貞), 임우리(林遇利) 두 수재와 우리 선인(先人)을 얻어 재산을 털어 가르쳤고, 세 사람이 배운 바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니, 온 고을이 화합하고 따라서 마침내 문헌(文獻)의 땅이 되었다. 선생이 서울에서 관리로 머물 때, 또한 영재가 있었으니 박은(朴誾) 등이 종유했고, 단천에 유배 되었을 때도 권우란(權遇鸞) 등이 질의하고 가르침을 청했다. 선생은 엄숙하고 청렴하여 집에 머물 때는 곡식 한 섬 도모하지 않았고, 대간과 시종(侍從)에 벼슬할 때도 보국을 급선무로 여기고 분연히 몸을 돌보지 않고 자주 올바른 말을 올려, 힘껏 대의(大義)를 떠받쳤다. 어릴 때부터 나라를 경영하고 세상을 구제할 재질을 가졌지만, 백분의 일도 펴보지 못하고 비운(否運)을 만나 결국 죄 없이 세상을 뜨니, 사림들이 애통해했다. 선생이 혹독하게 죽고 또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서, 그의 평생 저술은 흩어지고 영락해져 열 중 두셋도 남지 않았다. 내가 돌아가신 지 60년 뒤에 수습하여 겨우 소(疏), 기(記), 비명(碑銘) 7수와 《동국통감(東國通鑑)》의 논(論) 120수를 얻어 2권으로 만들고, 간행하여 장래에 전한다. 선생의 굳세고 걸출한 기개와 절개, 법도가 될 만한 국가 경영 계획, 의론의 정밀함과 간절함은 이 책을 살펴보면 그 일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융경(隆慶) 신미년(1571) 10월 계사에 외손 통정대부 수(守) 전라도 관찰사 류희춘인물 삼가 쓰다.[4]

上年余著辨明書 以辨漁樵隱受學錦南之說爲誤傳矣 厥後得見錦南集中柳眉巖所撰狀文 始知世傳非誤 乃司馬齋先生案誤錄也 蓋想先生案 曾經兵燹 收拾修正之時 以致年次榜次之誤耶 今乃傳書眉巖狀文于左 以爲考信之地

錦南先生崔公諱溥 字淵淵 羅州人 進士諱澤之子也 生有異質 剛毅精敏 旣長 治經屬文 卓冠時輩 年二十四 中進士第三 二十九 成化壬寅春 成廟謁聖取人 公以對正統策 登第第三 自爲上舍居泮宮 才名大振 與申公從濩等爲友 及筮仕立朝 累官爲典籍 參修東國通鑑 著論一百數十首 明白的確 大爲時論所推許 丙午 中重試亞元 自司憲府監察 爲弘文館副修撰 尋陞修撰 丁未 陞副校理 九月 以推刷敬差官 往濟州 弘治戊申閏正月 聞父喪 荒忙渡海 遭風漂至中國之台 六月 回到漢陽靑波驛 承上命 撰進漂海錄 厥後連丁內艱 壬子正月 免喪 除持平 諫官以前日初喪應命撰錄爲過而駁之 上以其議爲太深 御宣政殿引見問漂海首末 公細陳榻前 上嗟嘆曰 爾跋涉死地 亦能華國 乃賜依一襲 是年以書狀官赴京
癸丑春 爲世子侍講院文學 四月 拜弘文校理 臺官又循前論 玉堂諸學士啓曰 崔某連喪四年 一不到家 孝行卓異 願與同僚 成宗議于公卿 卒授之 五月 病遞 爲承文校理 甲寅正月 復爲弘文校理 八月 陞副應敎兼藝文應敎 藝文極選也 非將執文衡 莫得預焉 乙卯春 爲生員會試參考官 以得人名 丙辰五月 以湖西大旱 燕山命公往敎水車之制 至九月乃還 十一月 自相禮 爲司諫 丁巳二月 袝太廟後 公草疏極諫燕山之失 又痛詆公卿大臣 是月左遷爲相禮 差質正官赴京旣還 秋爲禮賓正 皆坐忤權貴
七月 史禍起 以公及申從濩等八人 嘗以所著文 科次於佔畢齋 燕山命搜其家 公獨以家藏佔畢集 受拷訊尋杖 流端川 公旣至謫所 處之坦蕩蕩 至甲子十月 燕山命拿致詔獄 將行刑 前夕 金公詮 洪公彦弼等 以輕繫同處 以酒餞 先生一一受飮 訣別 丁寧神色不亂 陽陽 陽陽[5]
如平時 公生于景泰甲戌 至是年五十一
正德丙寅 中廟靖國 追贈通政大夫承政院都承旨 先生博覽載籍 該洽過人 尤邃於易 敎導後生 亹亹不倦 海南爲縣 僻在海隅 舊無文學 禮儀亦荒陋 先生受室是邑 累年遊處 以正論變陋俗 又得尹孝貞林遇利二秀才及我先人 倒廩傾囷而誨之 三人以所學授徒 一鄕翕然 遂爲文獻之邦 官遊京洛時 亦有英材 朴誾等從之遊 謫端又有權遇鸞等 質疑請益 先生嚴厲廉介 居家未嘗爲甔石謀 出入臺諫侍從 急於報國 奮不顧身 屢進危言 力扶大義 自少抱經濟之才 百不一施 遭値否運 卒死非辜 士林痛惜 先生旣酷沒 又無嗣子 其平生著述 散亡零落 十無二三 希春收捨於六十年之後 僅得疏記碑銘七首幷東論一百二十首 爲二卷 鋟諸梓以傳將來 其氣節之勁特 經綸之規模 議論之精切 觀於此者 尙可以識其一端云 隆慶辛未十月癸巳 外孫通政大夫守全羅道觀察使 柳希春 謹識
























주석[ ]

  1. 이현궁(梨峴宮): 한성 동부 연화방(蓮花坊: 현재의 종로구 인의동)에 있었던 광해군의 잠저(潛邸). 배고개에 있었기 때문에 이현궁이라 불렸다. 인조의 아우 능원대군(綾原大君)이 살기도 했고, 숙종 대에는 숙빈(淑嬪) 최씨(崔氏)의 거처였다.
  2. 어초은(漁樵隱) 윤효정(尹孝貞)이 금남 최부에게 배웠다는 세간의 설이 잘못임을 밝힌 변명서는 1694년 7월 5일 일기에 수록되어 있다.
  3. 극선(極選): 특별히 잘 가려 뽑음.
  4. 이상의 류희춘이 쓴 글은 《금남집(錦南集)》(한국고전종합DB-금남집-錦南先生集序_柳希春)과 《미암집(眉巖集)》(한국고전종합DB-미암집-錦南先生事實記)에도 실려 있다.
  5. 《금남집》에는 ‘揚揚’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