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50503

jiam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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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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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5년 5월 2일 乙亥년 壬午월 甲子일, 양력 1695-06-14 1695년 5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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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5년 5월 3일 갑자
三日 甲子
맑음
최운원(崔雲遠)인물송창우(宋昌佑)인물가 왔다.
崔雲遠宋昌佑來
강성(江城)공간에서 권(權) 대감인물을 방문하고 희성(希聖)인물의 집으로 가서 집 뒤 작은 언덕을 올라서 둘러보았다. 이곳은 앞면이 모두 바위라서 꽤 이채로웠고, 언덕 위는 평평하고 고른 것이 세 칸 집을 지을 만 했다. 큰 내를 앞에 마주하고 있어서 시야가 꽤 넓었다. 내가 항상 그 아래를 오가며 그곳이 빼어난 곳임은 알았지만, 지금에야 비로소 올라보니 경관이 멀리서 보던 것보다 더 빼어났다. 강성공간은 한 마을이 전부 양반인데 아무도 여기에 정자 하나 짓지 않았으니 진실로 안타깝다. 나는 매양 이 얘기를 하여 강성 사람들을 책망하고 놀리며 집을 지어 왕래하며 노는 곳으로 삼기를 간절히 원했다. 희성인물에게 지켜주기를 부탁한다면, 폐단을 불러일으킬 근심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희성인물의 바램 또한 이와 같다. 하지만, 여기에 신경 쓸 여력이 없어 더욱 안타깝다. 희성인물과 그 부친 시달(時達)인물, 그리고 숙부 시한(時翰)인물, 윤진해(尹震垓)인물, 윤유도(尹由道)인물가 나와 함께 어슬렁거리다 잠시 후 다시 희성인물의 집으로 돌아오니, 소찬(小饌)물품이 차려져 나왔다. 대개 희성인물은 평소 몹시 가난하기 때문에 그것을 그가 스스로 마련한 것은 아니었고 옆집에서 혼례 때문에 마련한 것을 얻은 것이다. 희성인물은 본바탕이 진국이고, 또 다양하게 손재주가 있어서 내가 늘 그를 아낀다. 지금 그가 사는 집을 보니, 비록 매우 비좁긴 하지만 정묘함이 봐줄만 하며 체계가 없지 않았다. 그 부친인물은 상처하고 홀로 사는데 그를 봉양하는 것도 또한 칭송할 만 했다.
○訪江城權台 到希聖家 登覽家後小阜 此處前面皆岩頗奇 阜上平正 恰可着三間屋子 大川前帶 眼界頗濶 吾常往來其下 知其勝處 今始登臨所見 勝於望見 江城一村皆是兩班 而無立亭于此者 良可歎也 吾每以此言 責江城之人而戱之 切欲結搆 以爲往來逍遙之所 仍付希聖守護 則可無速弊之慮 希聖之願亦如此 而力不暇焉 尤可歎也 希聖及其父時達與其叔時翰尹震垓尹由道共我盤桓 須臾還到希聖家 則進小饌 蓋希聖素至貧 非渠自辦 乃求之於傍舍婚禮所備也 希聖質本醇良 且多手藝 吾常愛之 今觀其所居家舍 雖極狹隘 精妙可賞不無條理 其父鰥居 其奉養亦可稱也
흥아(興兒)인물이백(爾栢)인물이 시소(試所)에서 돌아왔다.
○興兒爾栢 自試所還
윤재도(尹載道)인물가 지나다 들렀다.
尹載道過
○표(表)는 “한(漢) 동중서(董仲舒)가 명전(名田)[1]을 제한하여 겸병(兼幷)하는 길을 막고, 노비를 함부로 죽여 없애는 행패를 제거할 것을 청하다”였으며, 부(賦)는 “한 문제(文帝)가 노대(露臺)[2]를 짓지 않다”, 책(策)은 ‘과거(科擧)’에 대한 것이었다. 흥아(興兒)인물는 표(表)와 책(策)을 지었다.
○表漢董仲舒請限名田塞幷兼之路 去奴婢除專殺之威 賦不營露臺 策科擧 興兒製表策
극인(棘人)개념 윤징귀(尹徵龜)인물가 밤에 지나다 들렀다.
○尹棘人徵龜夜過
























주석[ ]

  1. 한나라때 민간에서 사적으로 소유한 토지를 지칭함. 명전을 제한한다는 것은 토지겸병을 억제한다는 의미임.
  2. 중국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세우려고 했던 누대(樓臺)로 공사비가 중인(中人) 10집의 재산과 맞먹기 때문에 짓는 것을 중지하였다고 함.(한국고전용어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