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40705

jiam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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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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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4년 7월 4일 甲戌년 壬申월 辛未일, 양력 1694-08-25 1694년 7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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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4년 7월 5일 신미
五日 辛未
오른쪽 볼기에 큰 종기가 나서 말 할 수 없이 고통스럽다.
右臀尖生大腫 苦不可言
윤동미(尹東美)인물가 지난번에 윤이백(尹爾栢)인물과 함께 서울공간에서 함께 왔는데, 격포(格浦)공간에 이르러 머물며 지체하다가 이제야 돌아와서 들렀다.
○東美頃與爾栢自京同行 到格浦留滯 今始還來歷入

변명서(辨明書)
세간에는 어초은(漁樵隱)인물금남(錦南) 최부(崔溥)인물에게 수학하였고, 귤정(橘亭) 윤구(尹衢)인물의 학문은 집안에서 얻은 것이라 한다. 내가 옛 선인의 일에 대해 평소 잘 알지 못하여 오로지 전하는 말만 믿고 있었다. 그러다 올 여름에 우연히 해남(海南)《사마재선생안(司馬齋先生案)문헌》을 보았더니, 어초은은 신유년(1501년)에 생원개념이 되었고, 귤정은 계유년(1513년)에 생원과 진사개념가 되었으며, 금남은 정유년(1537년)에 진사개념가 되었는데, 한결같이 방목(榜目)개념의 순서대로 쓰여 있었다. 금남은 귤정보다 아래에 적혀 있고, 어초은보다 37년 뒤에 있었다. 그러하니 30년 전에 소과에 합격한 사람이 37년 뒤에 합격한 사람에게 거꾸로 수학하였다는 것은 결코 이치에 맞지 않는다. 또 선생안을 살펴보면, 어초은은 생년이 쓰여 있지 않아 알 수 없으나 귤정은 을묘년(1495년)에 태어났고, 금남은 갑술년(1514년)에 태어났다.[1] 금남이 태어난 해는 귤정보다 20년이 늦으니 어초은으로부터 반드시 4~50년이 늦을 것이다. 이를 근거로 생각해보면 어초은이 금남에게 수학하였다는 설은 잘못 전해진 것이 더욱 분명하다. 당초 이 설이 무엇에 근거하여 생겨났는지 모르겠으나, 그대로 전해지게 되면서 잘못인 줄 아는 사람이 없었고, 글로 쓰이기까지 되어 전하고 믿는 근거가 되었다. 지난번에 재상 김수항(金壽恒)인물낭주(朗州, 영암)공간에 유배되었을 때 《귤옥집(橘屋集)문헌》의 서문을 지었는데, 역시 이 설을 실어서 잘못 전해진 것이 더욱 심해졌으니, 후대의 사람들이 어찌 그렇지 않음을 알겠는가? 아아! 학문의 전수(傳授)는 유가(儒家)에서 소중히 여긴 것이다. 옛사람들이 사문(師門)의 내력을 분명하게 하지 않음이 없었던 까닭이 이 때문이다. 어초은(漁樵隱)인물금남(錦南)인물은 모두 우리나라의 명인(名人)들이나, 세상 사람들에게 잘못 전해진지 오래되어 이와 같이 선후의 뒤바뀜이 있기에, 부득이 위와 같이 분명하게 밝히고 옛일에 정통한 군자를 기다린다. 【이 글을 지은 후에 김수항(金壽恒)인물의 《귤옥집(橘屋集)문헌》 서문을 보았는데 이런 말이 없었다. 이 또한 잘못 전해진 것임을 알겠다.】

辨明書
世傳漁樵隱受學於崔錦南 橘亭之學 得於家庭 不佞於古先事素昧昧 唯傳者之言是信矣 今夏偶閱海南司馬齋先生案 漁樵隱辛酉生員 橘亭癸酉生進 錦南丁酉進士 一以榜次書之 而錦南在橘亭之下 後於漁樵隱三十七年 然則以三十年前司馬 反受學於三十七年之後進 斷無是理乎 且考先生案 則漁樵隱生年不爲懸書 今不可知 而橘亭乙卯生 錦南甲戌生 則錦南之生 後橘亭二十年 其於漁樵隱必爲四五十年之後矣 以此思之 則漁樵隱受學錦南之說誤傳益明矣 未知當初此說何所據而發 而因循相傳 無有知其誤者 或至於形諸文字 以爲傳信之資 頃年金相壽恒適居朗州時 作橘屋集序文 而亦載此說 其爲誤傳 因此益深 後來之人 何以知其不然也 嗚呼 學問傳授 儒家所重 古人未嘗不明其師門來歷 蓋以此也 今我漁樵隱錦南俱是我東名人 而久爲世人之誤傳 有此先後之倒錯 故不得不明辨如右 以竢博古之君子云 【此後得見金相橘屋集序文 則無此語 乃知此一款傳者之誤也】

























주석[ ]

  1. 또 선생안을…태어났다: 최부(崔溥)는 실제로는 1454년(갑술년)에 태어났다. 윤이후가 그의 생년을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