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30415
jiamdiary
1693년 4월 15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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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3년 4월 14일 | 癸酉년 丁巳월 戊子일, 양력 1693-05-19 | 1693년 4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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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3년 4월 15일 무자
十五日 戊子
흐리다 맑음
陰陽
졸곡제(卒哭祭)를 지냈다. 또 누님을 위해 예에 맞는 복(服)을 입고 망곡(望哭)[1]했다. 비록 외지에 있으나 중복(重服)[2]에 망곡을 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대상(大喪)을 당하여 졸곡 전에는 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 이미 졸곡을 지냈고 또 보름날이기 때문에 인정상 스스로 그만두지를 못한 것이다. 창아(昌兒)인물의 무리가 구석진 곳에 자리를 펴고 곡했다.
行卒哭祭 且爲姊主 服其服望哭 蓋雖在外處重服 望哭不可廢 而遭大故未卒哭之前 有不暇爲者 而今日旣經卒哭 且是望日 情爲所不能自抑 昌兒輩設席於屛處而哭之
미(彌)가 왔다.
彌來
양가송(梁可松)인물에게 밭 매입 값 38석(石)을 보냈다. 대개 양(梁) 생(生)인물은 무진년에 함홍남(咸弘男)인물의 집터를 샀다. 함의 땅은 내가 새로 지은 기오당(寄傲堂)공간 뒤 몇 척 위에 있는데, 사방이 모두 우리 밭이어서 내가 항상 사려고 했으나, 그가 팔 뜻이 없어 일단 그만두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거처할 만한 땅은 결코 아니다. 함(咸) 한(漢)인물이 이사하여 나갈 때가 되자 우리 집 장노(庄奴)노비와 가격을 약정하고 팔려 했는데, 양(梁)인물이 이 집터가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몰래 함(咸)인물을 꾀어 곱절의 가격으로 팔라고 했고, 함(咸)인물이 그 가격이 센 것을 이득으로 여겨 팔아버렸다. 그 땅은 보리 5 두락(斗落)에 불과한데 쌀 20석을 주고 샀다. 또 종복(從福)인물의 보리 8,9 두락 넓이의 밭이 함(咸)인물의 집터 북쪽 우리 밭 건너 6,70보 밖에 있는데, 종복(從福)인물이 마침 팔려고 하여 우리 집 장노(庄奴)노비가 그와 가격을 약정하고 문서도 작성했었다. 그런데 양(梁) 생(生)인물이 종복(從福)인물을 붙잡아 결박하고, 그와 상당하는 밭과 바꾸고 추가로 16석의 값을 더 주겠다고 협박했다. 양(梁) 생(生)인물이 함(咸)인물의 집터를 몰래 사고 보니 좁아서 집을 다 수용하기 어렵게 되자, 이 땅에 노복들이 살 곳을 마련할 심사였던 것이다. 이웃 간의 의를 생각하지 않고 구차하게 어리석은 속임수를 쓰는 꼴이 이러하니, 어떻게 하겠는가. 양(梁)인물이 함(咸)인물의 집터에 8,9간 짜리 집을 날림으로 지었는데, 갑자기 약한 바람에 무너졌다. 이치를 어기면 반드시 불길한 일을 당한다는 것을 이 일로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양(梁)인물의 이 일을 사람들이 모두 그르다고 여겨 공론이 험악하게 돌아가자, 그도 끝내 자기 소유가 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내가 내려간 후에 나에게 값을 마련하여 사달라고 청했다. 그래서 함(咸)인물의 집터 값 22석을 준급(準給)하여 샀으며, 또 16석으로 종복(從福)인물이 받은 것에 값을 보태서 환퇴(還退)하게 하였다.
○梁可松處田價租三十八石斗送 蓋梁生於戊辰年買咸弘男基 咸基在吾新搆寄傲堂後數尺之上 其四面皆吾田 余常欲買之 而渠無賣意 故姑置之 而決非他人所居之處也 曁咸漢移出之際 與吾家庄奴約價放賣 梁也聞此基之好 暗誘咸倍價而請買 咸也利其價優而賣之 厥基不過牟種五斗落 而以二十二石租買之 又有從福田牟種八九斗落者 在咸基之北越吾田六七十步之外 福也適欲賣之 吾家庄奴與之約價成文 而梁生捉致從福 結縛而劫之以田相等而換之 又給添價十六石 蓋梁生旣暗得咸基 而狹隘難容 故欲以此爲奴僕所居之計 其不思隣里之義 暗昧苟且之狀 爲如何哉 急急造家八九間於咸基 而忽爲微風所覆 其悖理不吉之驗 有如是耶 梁之此事 人皆非之 公論峻發 渠亦知其終不可爲己有 及余下來之後 請吾備直而買之 故咸基價二十二石準給而買 又以十六石 價從福所捧添價而使之還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