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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5=○李棘人大休過 葬事後下來 得兒輩卄三平書
 
|원문5=○李棘人大休過 葬事後下來 得兒輩卄三平書
  
|번역문6=○지난달 24일에 {{TagPerson|[[숙종|상]]}}께서 {{TagPlace|[[건원릉|건원릉(健元陵)]]}}에 배알하고 돌아오다 사장(沙場)<ref>사장(沙場) : 사하리(沙河里) 습진장(習陣場)</ref>에 이르렀을 때 전군(前軍)이 멈춰서 나아가지 않았다. 시위군은 전군이 나아가지 않는 것을 보고 바로 장대(將臺)로 올라갔다. 상께서 필마로 홀로 남아 급하게 물었는데, 이는 {{TagTerm|[[도감병|도감병(都監兵)]]}}들이 상께서 군사를 훈련시키려고 한다고 잘못 생각하고 스스로 문을 만들고 기다렸고, 시위병도 군령이 있는 줄로 잘못 알고 사장으로 갔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상께서 크게 놀라 급히 명을 내려 북을 울리고 진군하게 하였다. 동대문 밖의 {{TagTerm|[[소차|소차(小次)]]}}<ref>소차(小次) : 임금이 잠깐 쉬기 위해 막을 쳐 놓은 곳</ref>에 도착하자, {{TagPerson|[[신여철|훈련대장(신여철)]]}}을 잡아들이라고 명하였다. 훈련대장은 이미 동구(洞口) 안에 도착해 있었는데, 창졸간에 행진이 끊어진 것을 몰랐고, 행진을 잇대고자 했으나 멀어서 미칠 수 없기에 하는 수 없이 군대를 돌려 거슬러 오다가 중군(中軍)과 서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때 지연된 것이 꽤 오래 되어 상께서 세 번 {{TagTerm|[[령전|영전(令箭)]]}}<ref>영전(令箭) : 군령을 전하는 화살</ref>을 보내셨다. 처음에 곤장으로 처결하려 하였으나 대신들의 말에 따라 그 병부(兵符)를 빼앗고 파직하였으며, 단지 {{TagTerm|[[협연장관|협연장관(挾輦將官)]]}} 두 사람에게만 곤장을 쳤다. 궁으로 돌아온 후에 {{TagTerm|[[출대|출대(出代)]]}}<ref>출대(出代) : 관직을 대신 채움</ref>하거나 대죄(待罪)하지 말 것을 명하셨다. {{TagTerm|[[대간|대간(臺諫)]]}}에서 추고(推考)를 청하니 {{TagPerson|[[숙종|상]]}}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이 어찌 추고할 일인가.” {{TagTerm|[[교리|교리(校理)]]}} {{TagPerson|[[이진수|이진수(李震壽)]]}}가 상소를 올려 {{TagPerson|[[신여철|훈련대장(신여철)]]}}을 법에 따라 처벌해달라고 청하였는데 {{TagPerson|[[신여철|훈련대장(신여철)]]}}의 서자로서 {{TagTerm|[[진사|진사(進士)]]}}인 자가 {{TagTerm|[[융복|융복(戎服)]]}}을 입고 따라다녔다는 이야기도 상소 안에 들어 있었다고 한다. <ref>교리(校理) 이진수(李震壽)가 … 있었다고 한다 : 『조선왕조실록』 숙종 24년 8월 27일 무진 2번째 기사에 해당 내용이 실려있다. </ref> {{TagPerson|[[이세화]]}}가 후군(後軍)이었는데 병을 핑계로 뒤로 떨어졌다고 한다.<ref>지난달 24일에 … 떨어졌다고 한다 : 『조선왕조실록』 숙종 24년 8월 24일 을축 1번째 기사에 해당 내용이 실려 있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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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문6=○지난달 24일에 {{TagPerson|[[숙종|상]]}}께서 {{TagPlace|[[건원릉|건원릉(健元陵)]]}}에 배알하고 돌아오다 사장(沙場)<ref>사장(沙場) : 사하리(沙河里) 습진장(習陣場)</ref>에 이르렀을 때 전군(前軍)이 멈춰서 나아가지 않았다. 시위군은 전군이 나아가지 않는 것을 보고 바로 장대(將臺)로 올라갔다. 상께서 필마로 홀로 남아 급하게 물었는데, 이는 {{TagTerm|[[도감병|도감병(都監兵)]]}}들이 상께서 군사를 훈련시키려고 한다고 잘못 생각하고 스스로 문을 만들고 기다렸고, 시위병도 군령이 있는 줄로 잘못 알고 사장으로 갔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상께서 크게 놀라 급히 명을 내려 북을 울리고 진군하게 하였다. 동대문 밖의 {{TagTerm|[[소차|소차(小次)]]}}<ref>소차(小次) : 임금이 잠깐 쉬기 위해 막을 쳐 놓은 곳</ref>에 도착하자, {{TagPerson|[[신여철|훈련대장(신여철)]]}}</Person>을 잡아들이라고 명하였다. 훈련대장은 이미 동구(洞口) 안에 도착해 있었는데, 창졸간에 행진이 끊어진 것을 몰랐고, 행진을 잇대고자 했으나 멀어서 미칠 수 없기에 하는 수 없이 군대를 돌려 거슬러 오다가 중군(中軍)과 서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때 지연된 것이 꽤 오래 되어 상께서 세 번 {{TagTerm|[[령전|영전(令箭)]]}}<ref>영전(令箭) : 군령을 전하는 화살</ref>을 보내셨다. 처음에 곤장으로 처결하려 하였으나 대신들의 말에 따라 그 병부(兵符)를 빼앗고 파직하였으며, 단지 {{TagTerm|[[협연장관|협연장관(挾輦將官)]]}} 두 사람에게만 곤장을 쳤다. 궁으로 돌아온 후에 {{TagTerm|[[출대|출대(出代)]]}}<ref>출대(出代) : 관직을 대신 채움</ref>하거나 대죄(待罪)하지 말 것을 명하셨다. {{TagTerm|[[대간|대간(臺諫)]]}}에서 추고(推考)를 청하니 {{TagPerson|[[숙종|상]]}}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이 어찌 추고할 일인가.” {{TagTerm|[[교리|교리(校理)]]}} {{TagPerson|[[이진수|이진수(李震壽)]]}}가 상소를 올려 {{TagPerson|[[신여철|훈련대장(신여철)]]}}을 법에 따라 처벌해달라고 청하였는데 {{TagPerson|[[신여철|훈련대장(신여철)]]}}의 서자로서 {{TagTerm|[[진사|진사(進士)]]}}인 자가 {{TagTerm|[[융복|융복(戎服)]]}}을 입고 따라다녔다는 이야기도 상소 안에 들어 있었다고 한다. <ref>교리(校理) 이진수(李震壽)가 … 있었다고 한다 : 『조선왕조실록』 숙종 24년 8월 27일 무진 2번째 기사에 해당 내용이 실려있다. </ref> {{TagPerson|[[이세화]]}}</Person>가 후군(後軍)이었는데 병을 핑계로 뒤로 떨어졌다고 한다.<ref>지난달 24일에 … 떨어졌다고 한다 : 『조선왕조실록』 숙종 24년 8월 24일 을축 1번째 기사에 해당 내용이 실려 있다.</ref>
 
|원문6=○前月卄四日 上謁健元陵回到沙場 前軍箚住不進 侍衛之軍見前軍不進 直上將臺 上匹馬獨立 急令問之 盖都監兵臆料 上顧兵 自作門以待 故侍衛兵錯認有軍令赴場也 上大驚急令鳴鼓進軍 到東大門外小次 令拿入訓將 將已到洞之口內 倉卒之際 不覺行陣斷絶 乃引而續之 遠不可及 不得已回軍退來 與中軍相續 如此之際 遲延頗久 上三送令箭 初欲決棍 因大臣白 旣奪其兵符而罷職 只棍挾輦將官兩人 還宮後 令姑勿出代 亦勿待罪 臺諫請推考 上曰 此豈推考之事 校理李震壽䟽請按律 訓將有庶子進士者戎服從行 此言亦入於䟽中云 兵判爲後軍 稱病落後云
 
|원문6=○前月卄四日 上謁健元陵回到沙場 前軍箚住不進 侍衛之軍見前軍不進 直上將臺 上匹馬獨立 急令問之 盖都監兵臆料 上顧兵 自作門以待 故侍衛兵錯認有軍令赴場也 上大驚急令鳴鼓進軍 到東大門外小次 令拿入訓將 將已到洞之口內 倉卒之際 不覺行陣斷絶 乃引而續之 遠不可及 不得已回軍退來 與中軍相續 如此之際 遲延頗久 上三送令箭 初欲決棍 因大臣白 旣奪其兵符而罷職 只棍挾輦將官兩人 還宮後 令姑勿出代 亦勿待罪 臺諫請推考 上曰 此豈推考之事 校理李震壽䟽請按律 訓將有庶子進士者戎服從行 此言亦入於䟽中云 兵判爲後軍 稱病落後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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