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40528(윤달)

jiam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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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4윤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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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4년 윤5월 27일 甲戌년 甲午일, 양력 1694-07-19 1694년 윤5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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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4년 윤5월 28일 갑오
二十八日 甲午
맑았다 흐림
陽陰
전부(典簿) 댁(宅) 노(奴)노비서울공간로 올려 보냈다. 형수님인물의 뜻을 알려 반장(返葬)개념 문제에 대해 의논하는 일 때문이다.
委送典簿宅奴上京 蓋以嫂主意報議返葬事也
윤현귀(尹顯龜)인물가 왔다.
○尹顯龜來
尹希稷崔井翊鄭光胤來
윤정미(尹鼎美)인물별진(別珍)공간으로 돌아가는 길에 들렀다.
尹鼎美別珍歸路歷入
윤시상(尹時相)인물이 왔다.
尹時相來
○매번 집권당이 바뀔 때마다 과격하고 잔인한 논의가 위로는 조정으로부터 아래로 향읍에 이르기까지 끝간데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영의정개념 남구만(南九萬)인물 이하 소론의 당색을 가진 이들이 꽤 관대한 태도를 유지했고, 지방 수령들 또한 거중조정할 뜻을 가진 자들이 있어, 나주공간목사개념 (李曼著)인물는 한 쪽 말만 수용하는 일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전라도 서쪽의 악독한 자들이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고, 새로 온 관찰사개념 최규서(崔奎瑞)인물도 진정시키는데 힘쓸 뿐이었다. 근래 정권의 뒤바뀜이 심해서 사람들이 모두 뒷날의 보복을 걱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해남공간이라는 고을은 궁벽한 먼 바닷가에 있어서 옛날부터 당색이라 할 만한 것이 없었는데, 인심이 갈수록 예전 같지 않고, 또 민정중(閔鼎重)인물김수항(金壽恒)인물의 무리들이 갑인년(1674년) 이후 근처 고을로 유배되자, 그들에게 달려가 색목에 물든 자들이 많아졌다. 경신년(1680년)에 이르러서는 풍속의 무너짐과 어지러움이 더욱 심해지니, 통문을 내고 상소에 참여하여 배척하고 함정에 빠뜨림만을 한결 같이 일삼아, 우리 집안을 핍박하며 조금도 관대함을 두지 않았다.
○每當飜局之時 乖激慘刻之論 上自朝廷下至鄕邑 罔有紀極 而今番則領相南九萬以下少論爲目者 頗持寬緩 守令亦有調停之意者 羅牧李曼著少不容受一邊之言 以故如羅西之怪毒 不能逞其計 新方伯崔奎瑞唯務鎭靜 蓋近來飜覆無常 人皆有後日報復之慮故也 海南爲邑 僻在遐陬 古無名目之相形而人心漸不如古 且以閔鼎重金壽恒輩甲寅後謫配近邑 趨風染迹者多 及至庚申而壞亂滋甚 發通參疏 一以擠䧟爲事 侵逼吾家亦不少饒矣
지금 나이가 어리고 일 만들기를 좋아하는 한두 사람이 괴상하고 망측한 일을 벌여도 세상살이를 약간 아는 자들은 곧장 금하여 하지 못하게 하고 있는데, 오직 현감개념 최형기(崔衡基)인물만은 갑자기 아부할 마음을 가져 연동(蓮洞) 서원공간에 쌓아둔 재목을 억지로 가져다가 권(權) 상(相)인물의 거처를 수리하는 데 썼다. 또 향교를 중수할 일이 생기자 향교의 유생들에게 서원 기와물품를 뜯어다가 쓰게 했다. 향교 유생들이 온당치 않다고 여기자, 해남현감인물은 “모쪼록 다시 덮을 것이니 미안할 것이 무엇인가? 그대들은 어찌 그렇게 자잘하게 구는가?”라고 말하며 서재(西齋)에 얹은 기와물품를 뜯어 갔다. 정국이 아직 바뀌지 않았고 서원[1]의 일이 한창이라면 우선 옮겨 쓴들 무슨 대수랴만, 지금 이 행동은 시의에 영합하려는 것이니 통탄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여론이 흥기하여 피차를 막론하고 놀라워하지 않는 자가 없는데도, 해남 현감인물은 반성할 줄 모르고 도리어 화내며 말하니, 가소롭다.
今則一二人年少喜事者 雖有怪妄之擧 而稍知人事者輒禁而止之 獨縣監崔衡基旋有俯仰之意 勒取書院留儲材木 用於權相寓所修理 又有鄕校重修之事 令校儒撤毁書院所蓋而用之 校儒以爲未安 則倅曰從當某條還覆 何謂未安乎 君輩何其細鎖乎 仍撤西齋所蓋瓦而去 若使時事未變 院事方張 則姑先推移用之 固無所害 而今此擧措有若迎合時議者然 可勝痛哉 以此之故 物論朋興 毋論彼此 莫不駭然 海倅不能自反而反怒言之者 可笑























주석[ ]

  1. ‘향교’를 잘못 쓴 것으로 여겨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