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40406

jiam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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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4년 4월 5일 甲戌년 己巳월 癸酉일, 양력 1694-04-29 1694년 4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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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4년 4월 6일 계유
六日 癸酉
아침에는 안개가 꼈으나 오전 늦게는 맑음
朝霧晩陽
일찍이 들으니, 가지도(可枝島)공간이의신(李懿信)인물어머니인물를 장사지낸 곳이 매우 기괴하여 볼만하다고 했다. 아침식사 후에 창아(昌兒)인물, 송시민(宋時敏)인물, 기진려(奇震麗)인물, 윤필후(尹弼厚)인물와 함께 배를 타고 잠시 뒤 가지도(可枝島)공간에 도착했다. 한 줄로 가로누운 산등성이는 첩첩이 쌓인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암석사이를 올려다보니 지붕의 한 귀퉁이가 약간 드러나 있었다. 바위를 타고 위로 올라가면 산꼭대기에 큰 바위가 있는데, 가운데가 빈 것이 마치 솥을 엎어 놓은 것 같다. 앞면에는 서까래물품를 걸쳐 기와물품로 덮어놓았고 그 안에는 구들물품을 작게 두 칸 설치했으며, 앞 기둥은 헌(軒)으로 삼고 양 머리는 부엌으로 삼았다. 집에 들어가 올려다보면 바로 석굴(石窟)인데, 앞 처마에 짧고 작은 서까래물품만 올렸다. 처마 아래는 한 갈래 길이 비스듬히 이어져 사람이 겨우 오고 갈수 있는 정도다. 길머리에는 굴이 하나 있다. 아래 바닥까지 수십 길쯤 직통해있는데, 이른바 가지굴(可枝窟)공간이다. 헌(軒) 위로 올라가면 눈 아래 바로 바다가 있어 몸을 구부려 침을 뱉을 수 있다. 집의 위아래 모두 큰 바위가 있는데, 어떤 곳은 평평하고 넓어서 열 사람쯤 앉을 수 있고, 어떤 곳은 1~2장(丈) 쯤 우뚝 솟아 있다. 가장 높은 곳에는 네다섯 장 되는 선돌(立石)이 있고, 한 그루 소나무가 선돌의 면에 기대어 서있다. 돌 위로 우뚝 솟은 소나무의 모습이 마치 우산을 펼친듯하여 볼수록 기이하다. 위아래로 오르내리면서 힘들어 땀에 옷이 젖는 것도 몰랐다. 그래서 옷을 벗어 말리고 잠시 뒤 아래로 내려갔다. 이(李) <Term id="M560" name="지사">지사(地師)인물</Person>가 어머니인물를 장사지낸 자리는 용(龍)개념아산(芽山)공간으로부터 와서 10여리정도 혹은 끊어지고 혹은 이어지다가 끝머리에 이르러 갑자기 금성(金星)이 일어나고, 바로 붕홍(崩洪)개념한 채 맥이 지나서 가지굴공간이 된 곳이다. 붕홍한 중심으로부터 하나의 맥이 옆으로 10보쯤 매우 가늘게 나왔는데, 일어난 맥이 동과(冬瓜) 모양 같으며 꽤 커서 하나의 큰 바위를 이룬다. 동과(冬瓜) 모양의 끝머리에는 10보쯤 평지를 이루어 또 작은 동과(冬瓜) 모양을 이루는데, 그 근방에 횡장(橫葬)[1]했다. 작은 동과(冬瓜)의 좌우는 모두 조수(潮水)가 드나드는 곳이며, 두 동과(冬瓜)의 사이는 땅이 평평하고 맥이 이어지는 곳이다. 가끔 조수가 드나들 때 만조(滿潮)가 되면 무덤의 삼면 밖 계절(階節)[2] 아래는 모두 바다가 되어 한주먹 외로운 무덤이 물위에 떠있게 된다. 땅의 길흉은 육안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온통 기괴한 곳을 일유(一惟)가 아니면 어찌 쓸 수 있었겠는가? 작은 동과 또한 모두 돌이기 때문에 사토로 덮어 놓았다. 입장(入葬) 때 돌 위에 관을 안치하고 바깥은 흙으로 봉분을 만들었다고 한다. 청룡(靑龍)은 졸성(卒星)으로부터 나왔고, 백호(白虎)는 가지도(可枝島)공간다. 일유(一惟)가 누구냐면 이(李) <Term id="M560" name="지사">지사(地師)인물</Person>의 자호(自號)다. 이(李) <Term id="M560" name="지사">지사(地師)인물</Person>가 장사를 지낸 주산(主山)의 산허리에는 쌍총(雙塚)이 있다고 한다. 임희(林熙)인물가 직접 땅을 골라 부인을 장사지내고, 그 후에 임희(林熙)인물를 장사하여 쌍총이 되었다. 산허리는 아무런 모양도 없는 형국이다. 임희(林熙)인물는 어려서부터 풍수개념를 업(業)으로 삼아서 사람들이 그가 풍수를 잘 안다고 높이 평가하지만, 그가 직접 잡은 자리가 이와 같으니 정말 가소롭다.
嘗聞可枝島李懿信母葬處 極奇恠 可觀 朝食後與昌兒宋時敏奇震麗尹弼厚乘舟 食頃到可枝島 一帶橫巒疊石而成 仰見岩石間 屋瓦一角微露 緣岩而上 則山頂大岩中空如伏釜 架椽前面而覆之以瓦 其中安堗二小間 前楹爲軒 兩頭爲廚 入室仰見則乃是石窟 只前簷短小椽也 簷下有一條路 橫亘堇通往來 路頭有一穴 直通下底數十丈許 卽所謂可枝窟也 登臨軒上 則眼底卽滄溟 可以俯唾 屋上下皆大岩 或平廣可坐十餘人 或陡立一二丈許 最上頭有立石四五丈者 一株松倚石面立 聳出石上如張蓋狀 見之尤奇 上下登陟 不覺勞汗透衣 脫而曬之 少頃轉下 李地師母葬處 蓋龍自芽山而來 或斷或連十餘里 至盡頭 頓起金星 旋卽崩洪 過脈爲可枝窟 從崩洪中橫出一脈 極細十餘步許 卽起脈如冬瓜狀頗大 乃一大岩 而冬瓜狀盡頭 卽成平地十餘步許 又成小冬瓜形 橫葬於其頭 小冬瓜左右皆是潮水出入之處 兩冬瓜之間 平地過脈之處 或有潮水相通之時潮滿 則墳之三面外階節下皆成海 一拳孤墳浮於水上 地之吉凶 非肉眼所知 而節節奇怪 非一惟何能用之 小冬瓜亦皆石 以莎土覆之 入葬時安棺於石上而外土成墳云 靑龍則出自卒星 白虎則可枝島也 一惟爲誰 李地師自號也 李葬主山之腹有雙塚云 是林熙自卜葬妻 厥後葬林爲雙塚山之腹 蕩然無形局 林自少以風鑑爲業 人亦推以爲知而其下手處如此 良可笑也
두루 구경하고 나서 가지도(可枝島)공간 서쪽으로 발길을 돌려 배가 돌아오기를 기다려 덕포(德浦)공간 용당리(龍塘里)공간로 향했다. 그곳은 주부개념 임속(林涑)인물이 사는 곳이다. 임속(林涑)인물의 거처는 평소에 유명하여 예전부터 한번 보고 싶었다. 또 임속인물이 거처를 옮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고 듣고, 내가 모처(某處)와 바꾸고 싶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용당(龍塘)공간에 있는 임속인물의 집에 도착했다. 집채와 연못, 화훼(花卉) 모두 볼만 했다. 터의 형국은 둘러싸고 있는 산세가 맑고 기이하며, 또 고기잡이와 염전의 이점을 갖고 있어 정말 살만한 땅이다. 지세가 깊고 궁벽하며 경치가 아주 빼어나 늙은이가 여생을 보내기에 더욱 알맞다. 주인은 음사(蔭仕)로 주부개념가 되었는데, 사람됨이 소탈하고 품격이 있어 좋아할만 하다. 바로 소찬을 내어 대접하고 이어서 저녁을 대접했다.
周覽旣畢 轉于可枝西以待船迴 仍向德浦龍塘里卽林主簿涑所居也 林之居素有名 嘗欲一見 且聞林有換移之意 余欲以某處換取故也 須臾到龍塘林家 家舍池塘花卉皆可觀 而基局回抱山勢淸奇 且有漁鹽之利 眞可居之地 地勢幽僻 景致殊節 尤宜於老休矣 主人蔭仕爲主簿 爲人疎雅可愛 卽出小饌以饋之 仍供夕飯
해질녘 서로 헤어지고 배로 돌아왔는데, 바람이 거세고 물이 역류하여 가지도(可枝島)공간에 정박하고 염소리(鹽所里)공간로 찾아들어가 기숙했다. 한밤이 되기 전, 뱃사람이 와서 조수가 들어온다고 고하기에 억지로 일어나 물품에 올랐다. 한참 뒤에 속금도공간로 와서 정박했는데, 닭이 이미 너덧 번이나 운 뒤였다. 밤을 무릅쓰고 조수를 타느라 고생이 너무 많았다. 비로소 옛 사람의 ‘길이 있거든 배를 타지 마라.’는 말뜻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日沒時相別而回舟 風緊水逆 停棹於可枝 尋入鹽所里寄宿 夜未半舟人來告潮入 强起登船 良久來泊束今島 鷄已四五鳴 冒夜乘潮 苦狀頗多 始信古人有路莫乘船之句也

심적암(深寂菴) 중수기(重修記)
내가 전에 덕천(德川)의 떡 가게를 지나는데, 등불 아래 노파 서너 명이 둘러 앉아 떡을 빚고 있었다. 한 노파가 말하기를 “떡은 작게 빚고 이익은 많이 보고 싶지만, 오직 죽어 명부에 들어가서 철가(鐵枷)[3]의 고초를 당할까 두려워서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한다.”라고 했다. 다른 노파들도 웃으면서, “그렇다”고 했다. 저들은 거리의 가게에서 떡을 파는 아녀자로서, 새벽에 일어나서 끊임없이 열심히 작은 이익을 다투다가 습관이 천성이 되었다. 설사 소진(蘇秦)과 장의(張儀)의 능란한 화술과 공수(龔遂)와 황패(黃覇)의 교화하는 능력으로 그들에게 인의예지를 누누이 말하더라도, 저들은 반드시 귀머거리처럼 귀를 막고 맹인처럼 눈을 감을 것이다. 그러하니, 인간 세상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을 하늘을 벗어나고 땅으로 들어가도록 놀라운 말로 꾸며 유혹하고 선동하여, 어리석은 지아비와 지어미로 하여금 두려워 반성하고 이기심을 참고 욕심을 절제하게 하며, 형벌을 주지 않아도 위엄이 서고 명하지 않아도 스스로 금하는 것은, 불교의 공이 또한 조금 도운 바가 있다.
만허(萬虛) 스님은 깊이 들어가고 높이 올라가서 지리산공간심적암(深寂菴)공간에 거주한다. 암자가 오래되어 무너지고 기울어져서 마치 도가 높은 사람이 절뚝거리고 몸이 기운 것과 같다. 하루라도 거기를 찾아가면 두려워서 오래 머물 수 없을 정도여서, 그 암자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도리어 즉시 발걸음을 돌리게 된다. 대사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사람이 세상에 나서 대궐 같은 집과 부드러운 방석 위에 앉으면 편안하기는 편안할 것이다. 네 마리 말이 끄는 큰 수레에 타면 높기는 높을 것이다. 그러나 염여퇴(灔澦堆)[4]와 태항산(太行山)[5]의 길로도 그 위험한 것을 비유하기에는 부족하다. 선생은 이 집을 위험하다고 생각하는가?”
암자의 승도가 대사에게 집을 고치기를 청했다. 그러자 대사가 시주를 널리 모집하여 여러 해 경영하여 옛날 모습대로 고쳐지었다. 건물의 빼어남과 아름다움은 전에 비하여 더욱 빛난다. 공사가 끝나자 내게 기를 써달라고 청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천지간의 여관을 자기 소유라고 여기며 말하기를 내 방, 내 집이라고 하는데, 결국 이것은 아롱(鵝籠)[6]과 선각(蟬殼, 매미 허물)일 뿐이다. 저 사미(沙彌)들은 또 가정의 즐거움과 자손의 사랑도 없이 구름 낀 숲과 안개 낀 골짜기에서 병 하나와 발우 하나로써 온 곳도 정한 곳이 없고 갈 곳도 매인 곳이 없는데, 오히려 마음을 펼치고 서원을 맹서하며 재물을 내고 힘을 다하여 기운 사람은 바로 세워주고 위험한 사람은 편안하게 한다. 이것은 반드시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즐기는 바가 그 사이에 있어, 뒤섞여도 흐려지지 않고 말려도 막을 수 없다. 세상 사람들이 남의 집에 살고 남의 밥을 먹으면서 그 방이 낡고 그릇이 기울어져도 오히려 시시덕거리며 걱정하지 않는데, 대사를 보면 마음이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그리하여 거듭 느끼는 바가 있다.

深寂菴重修記
余昔過德川之賣餠店 燈下有老婆三四 圍坐裁餠 一婆云 餠欲其裁之小而取贏多也 惟懼死入冥府 受鐵枷苦楚 不敢爲是 諸婆嘻嘻曰諾 彼以街肆販婦 鷄鳴而起 營營孶孶 錐刀是競 習與成性 雖蘇張之善辯龔黃之化俗 驟語之以仁義禮智 彼必襃然以聾 矇然以睡 於是乎 糚出人世之所不聞所不睹 出天入地可驚可愕之言 誘惑煽動 使愚夫愚婦 怵惕反省 忍己節慾 不刑而威 不令而禁者 釋氏之功 抑亦有少補也
萬虛上人 賾陟住居于頭輪之深寂菴 菴年久傾頹偃蹇 若高人之跛倚 一日訪焉 凜乎其不可久留 足纔及軒而反旋踵焉 師啞然笑曰 人之處世 廣廈細氈 安則安矣 軒車駟馬 尊則尊矣 而灔澦之堆 太行之路 不足以喩其險也 子以是爲危乎
菴徒乞師改宇 師廣募檀緣 經營數年 因舊制而修創之 棟宇之傑 輪奐之美 眎前增輝 功旣訖請余爲記
余以爲天地蘧廬 莫不竊竊然 自私 曰我室我家 究竟是鵝籠蟬殼 彼沙彌者 又不有室家之樂 子孫之戀 而雲林烟壑 一甁一盂 來無定所 去不牽顧 猶能發心誓願 捐財殫力 使敧者正之 危者安之 是必不有挾於己 而所悅者存乎其間 淆之不濁 挽之不沮矣 世之人 居人之宅 食人之食 而視其室弊器敧 猶且怡怡然 不以爲憂 觀於師 得不愧心 余於是重有感焉

























주석[ ]

  1. 머리를 동쪽을 향하게 하고 발은 서쪽을 향하게 묻는 것을 말함.
  2. 무덤 앞에 평평하게 만들어 놓은 땅.
  3. 쇠로 만든 목에 씌우는 형구(刑具)
  4. 배를 타고 무사히 건너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험하다는 장강(長江) 구당협(瞿塘峽)의 여울물 이름
  5. 중국 하남성과 산서성 경계에 있는 태항산은 길이 험준하기로 유명하다. 백거이(白居易)의 시 〈태항로(太行路)〉에 “태항산 험한 길 수레를 부수지만, 인심에 비긴다면 평평한 길이로고.(太行之路能摧車 若比人心是坦途)”라고 했다.
  6. 아롱(鵝籠): 아롱서생(鵝籠書生). 변화무상한 환상적인 이야기로, 남조 양(南朝梁) 오균(吳均)의 《속제해기(續齊諧記)》에 실려 있다. “양선(陽羡)과 허언(許彥)이 거위 장〔鵝籠〕을 지고 가다가 한 서생을 만났다. 서생이 다리가 아프다며 거위 장 속에 타고가기를 요구해서 태웠다. 한 나무 아래 이르러 서생이 나오더니 입에서 그릇과 음식을 토하여 허언과 함께 마셨다. 또 한 여자를 토하여 함께 앉아 놀았다. 서생이 취하여 눕자 여자가 한 남자를 토했다. 여자가 눕자 남자가 한 여자를 토하여 함께 마셨다. 서생이 깨려하자 여자가 또 비단 휘장을 토하여 서생을 덮고는 그 안에 들어가 함께 잤다. 남자가 따로 한 여자를 토하여 술을 마시며 놀았다. 그 후 각기 토한 것을 차례로 삼키고, 서생이 구리 쟁반 하나를 허언에게 주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