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80917

jiamdiary
15.164.86.204 (토론)님의 2020년 2월 3일 (월) 23:04 판 (import)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1698917
← 이전 다음 →
1698년 9월 16일 戊寅년 壬戌월 戊子일, 양력 1698-10-20 1698년 9월 18일


태그숨기기


원문이미지보기


1698년 9월 17일 무자
十七日 戊子
맑음
김삼달(金三達)인물, 윤척(尹倜)인물이 왔다.
金三達尹倜來
극인(棘人)개념 이(李) 제(弟)인물가 인사하고 갔다.
李棘弟辭去後
그러고 나서 윤척인물과 함께 흥아(興兒)인물를 데리고 평촌(坪村)공간의 문장(門長) 댁으로 갔다. 문장인물물품를 타고 고기를 잡기로 했는데, 오늘이 약속한 날이기 때문이다. 문장인물 및 족숙(族叔) 상미(尙美)인물, 정미(鼎美)인물, 이홍임(李弘任)인물, 윤척인물, 나와 흥아인물가 함께 월진(月津)공간[1]으로 갔더니, 남궁량(南宮{玉+亮})인물, 윤이면(尹以冕)인물, 윤행도(尹行道)인물, 윤점(尹點)인물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與尹倜率興兒進坪村門長宅 蓋門長有乘舟打魚 今日爲約之事也 門長及族叔尙美鼎美李弘任尹倜吾與興兒偕到月津 南宮{玉+亮}尹以冕尹行道尹點先已來待
윤점인물은 금릉(金陵) 고읍(古邑)[2]에 사는 윤암(尹黯)인물의 동생이다. 지난번에 합장암(合拿庵)공간으로 가면서 석문(石門)공간에서 물품을 쉬었을 때 마침 마주쳤었고, 또 제사에 같이 참례하기도 했었는데, 한마디 말도 서로 나누지 않았다. 문중 사람들이 모두 말하길, <Person id="P1142" name="윤암">윤점 형제인물</Person>는 논의하는 것이 다르고[3], 향교나 서원에서 득의양양해서 문중의 장자(長者)까지 무시하니 일삼는 것이 몹시도 터무니없다고들 한다. 윤점인물도 문중의 논의가 험악하다는 것을 필시 들었을 터, 오늘 온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나를 만나 말하기를, 지난번 일은 무시하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나가던 사이 경황이 없는 중에 데면데면 말을 받은 것이며, 감히 하지 못한 바가 있었다고 하였다. 이어서 말하기를, 예전에 그가 향시(鄕試)개념에 합격해 상경했을 때 나를 찾아와 정성스레 대접받았던 일을 이야기하면서, 누누이 사죄했다.
點乃金陵古邑黯之弟也 頃於合拿庵之行 石門歇馬時 適與逢着 又於祭祀同參 而不以一言相接 門中之人皆言點兄弟異論 方得意於校院之間 故越視門中長者 事甚無據云云 點也必聞門議之峻 今日之來 蓋以此也 見我言 向日之事 非出於越視之意 過去之間 紛擾之中 泛然納言 有所不敢 仍言 前日渠得鄕解上京時 委進蒙款之事 縷縷謝罪
이어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포구공간 가의 깎아지른 언덕에 앉았다. 내가 말했다. “여기 경치가 아주 좋네. 이 언덕이 바닷가로 불룩 튀어나와 있어 마치 배를 탄 것 같은데, 작은 배에 불안하게 흔들흔들 앉아 있는 고충도 없으니, 우리들 뱃놀이가 이걸로 이미 충분하군.” 그러자 모두들 웃고는, 각자 가지고 온 물품과 안주를 내어 서로 권했다. 잠시 후 작은 물품가 와서 정박했는데, 평촌 문장 댁에서 미리 마련한 것이다. 그대로 함께 배에 오르니, 날이 이미 저물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잠시 느긋하게 배 띄워 놀다가 육로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 물 한가운데에 배 띄워 달이 뜨기를 기다렸다가 만덕(萬德) 포구공간까지 물품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며 서로 고집하니 결정이 나지 않았다.
乃與諸人坐浦邊斷阜 余曰 此地風景甚好 此阜突臨波上 勢如乘舟 而無小舟搖兀不安之苦 吾輩之船遊 此已足矣 諸客皆笑 各出所持酒肴而相勸 俄而小艇來泊 乃坪村預爲料理者也 仍與上舟 日勢已暮 或言 暫爲容與從陸還去可也 或言 中流待月 泝上萬德可也 相持不決
좌중의 사중(士重) 이홍임(李弘任)인물은 훌륭한 선비인데, 달을 보며 물품로 거슬러가자는 의견 쪽을 고집했고, 나 또한 찬성했다. 그래서 육로로 노(奴)와 말을 보내 곧장 만덕사(萬德寺)공간로 가게 하고 그대로 물품를 띄워 돛을 올렸다. 바람이 한가롭게 불고 파도가 고요하여 배가 앞으로 갔다 뒤로 물러났다 하고, 해가 지고 달이 뜨자 아름다운 풍경이 이루 표현하기 어려웠다. 평촌의 피리물품 부는 동자와 거문고물품 타는 아이가 흥을 내어 연주했다. 거문고 타는 아이는 창도 잘 했는데, 윤척인물의 노랫가락 또한 흥겨웠다. 술자리가 꽤나 낭자하여 모두들 매우 즐거워했다.
座中李弘任士重佳士也 偏執泝月之言 余亦唯之 陸送奴馬 使之直進萬德 仍放舟掛席 風恬波靜 乍前乍却 日落月出 淸景難狀 坪村笛童琴兒發興吹彈 琴兒且善唱 尹倜歌調亦快 盃盤頗狼藉 諸客樂甚
이른바 농어바위공간에 도착하여 모두 물품에서 내렸다. 바닷가 바위가 비루하여 보잘 것 없었지만, 그나마 나은 곳을 골라 잠시 앉으니 맑고 상쾌하여 좋았다. 잠깐 있다가 도로 물품에 올랐다.
到所謂鱸魚岩 皆捨舟而下 海邊巖石齷齪 無可觀 而擇勝假坐 亦瀟爽可喜 須臾還上舟
정미(鼎美)인물 씨(氏)가 미리 뱃사공에게 고기잡이 도구를 차려놓고 기다리라고 했었는데, 준비된 것이 없었다. 정미 씨인물가 무섭게 꾸짖으며 책망했다. 내가 말하였다. “오늘 같은 날 얻고자 하는 것은 흥인데, 눈에 가득한 풍경으로 배가 이미 찼소. 고기를 잡고 잡지 않고를 따질 필요가 있겠소?” 정미 씨인물가 웃으며 그만두었다. 그리고는 데리고 온 비(婢)에게 회를 차려 올리게 했으니, 집에서 가지고 온 것이다. 정미 씨인물의 풍도(風度)가 치밀하다고 할 만하다. 아마도 단지 경치 구경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힘써 준비하여 나이 드신 아버지가 즐기며 기뻐하는 얼굴을 보고자 한 의도였을 것이니, 가히 지극하다 할 만하며 지극히 감탄하고 상찬할 일이다.
鼎美氏預令舟人設漁具以待而無所備 鼎美氏重加呵責 余曰 今日之事 所取者興 滿眼風景 腹已飽矣 得魚與否 何足問也 鼎美氏笑而止 仍令帶來婢子 設膾以進 蓋自家持來者也 鼎美氏風度可謂周密 而想其意不但爲風景 其用力備辦 欲覩老親一時之歡顔 可謂至矣 極可歎賞
시간이 흘러 어느덧 만덕(萬德) 포구공간에 도착했다. 포구 앞 해안에 배를 대니, 노(奴)와 말이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즉시 배에서 내려 물품을 타고 만덕사(萬德寺)공간로 들어갔다. 판전(板殿)에서 유숙하니, 이미 2경이었다.
荏苒之間 已到萬德浦 泊舟前岸 則奴馬已來候 卽下舟騎馬入寺 宿于板殿 已打二更鼓矣
윤척인물은 뒤로 쳐져 그의 집에 들렀다가, 물품과 먹을 것을 준비해 왔다. 내가 술을 마시지 않기 때문에 나를 위해 차린 것이다.
尹倜落後 歷入其家 備餠饌以來 蓋以我不飮 爲我而設也
잠자리에 들었다가 다시 일어나 무료함을 달랬다. 윤간(尹侃)인물은 마침 외출할 일이 있어 뱃놀이에 참가하지 않았다가 밤늦게 뒤따라 도착했는데, 윤휘진(尹彙晉)인물을 데리고 왔다. 이 사람은 윤주상(尹周相)인물, 윤민(尹玟)인물, 윤명상(尹命相)인물과 가까운 얼자(孽子)인데 노래를 잘 부르고 잡기에도 능하지 않은 게 없었다. 자리에 앉았던 사람이 모두 포복절도하고 파했다.
旣就寢 復起攻破 尹侃適出他未參船遊 夜深追到 携尹彙晉以來 乃尹周相玟命相近孼也 善唱歌且於雜戱無不能焉 滿座絶倒而罷
아아! 나는 몇 년 사이 환난이 매우 참혹했으니, 차마 다시 무슨 말을 하랴! 정신과 혼을 모두 잃어 인간 세상에 다시는 뜻을 두지 않았으니, 한번 크게 입을 벌려 기쁘게 웃으려 해도 도무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정미 씨인물의 이러한 훌륭한 수완이 없었다면, 내가 어찌 이런 좋은 일을 누릴 수 있겠는가?
噫 余於數年來 患難孔慘 更忍何言 神魂都喪 無復有人世間生意 雖欲一開口歡笑 顧無所措矣 不有鼎美氏好手段 吾安能得此勝事
문장인물은 77세로서 보고 듣고 행동하는 것이 젊은이와 다를 바 없고, 큰 술잔물품을 가득 채워 마시면서도 말하고 웃는 데 흐트러짐이 없으니, 이는 실로 인간 세상에 보기 드문 일이다. 그러니 정미 씨인물가 오늘 가졌을 부모에 대한 기쁘고도 두려운 마음[4]이 마땅히 어떠하였겠는가! 정미 씨인물는 힘을 다해 받들어 즐겁게 모시면서 의당 지극히 하지 않음이 없었지만, 역시나 사람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미 씨인물에게 축하와 감사를 보내 마지않는다. 나 같은 불초한 이는 다만 천지간에 궁박하고 볼 품 없는 한 사람에 지나지 않으니, 애통함과 우울함을 어찌 말로 표현하겠는가?
而門長以七十七歲 視聽起居 無異少壯 引滿大盃 言笑不亂 此實人間稀覯 而鼎美氏今日喜懼之心 當如何耶 鼎美氏極力奉歡 宜無所不至 而亦非人之所易爲者 爲鼎美氏賀謝不已 如吾不肖 特一天地間窮薄無似之人 痛悒何言




















주석[ ]

  1. 월진(月津) : 월곶나루. 현재의 도암면 망호선착장 부근으로 추정된다.
  2. 금릉(金陵) 고읍(古邑) : 금릉은 현재의 강진이다. 강진의 『유향좌목(留鄕座目)』(1509년 4월 8일부터 1643년 1월 10일까지의 기록)에 따르면 (‘강진신문’ 2002년 7월 12일 기사 '강진의 옛 마을들'에서 재인용), 바다를 통하여 쳐들어 오는 왜구를 막기 위해 전라도 병영을 강진에 설치하기로 1417년 1월 20일에 확정하고 북쪽의 도강현(道康縣)과 남쪽의 탐진현(眈津縣)을 합하여 강진(康津)이라 하고 치소를 탐진현 옛터에 두었었다. 그후 도강현쪽 사람들의 요청으로 1429년에 송계(松溪)로 치소를 옮겼다가 1475년에 탐진현 옛 치소터로 다시 옮겨왔다고 한다. 금릉 고읍, 즉 옛 도강현 치소는 월출산 아래인 강진군 성전면 지역에 있었다.
  3. 논의하는 것이 다르고 : 원문의 ‘이론(異論)’은 당색(黨色)이 다르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4. 부모에 대한 기쁘고도 두려운 마음 : 『논어(論語)』「이인(里仁)」에 보면, 부모의 나이를 통해 오래 사셔서 기쁜 한편 언제 돌아가실지 몰라 두려운 마음을 가진다는 내용이 보인다.(父母之年 不可不知也 一則以喜 一則以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