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80828

jiam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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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8년 8월 27일 戊寅년 辛酉월 己巳일, 양력 1698-10-01 1698년 8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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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8년 8월 28일 기사
二十八日 己巳
밤부터 빗발이 간간이 뿌리다가 늦은 아침 후에 그쳤는데 흐린 상태는 걷히지 않음
自夜雨脚間洒 晩後乃止而陰不捲
○날이 밝을 무렵 이 령(令)인물성복(成服)개념하였다. 나와 목 대감인물이 들어가서 조문하였다. 목 대감인물은 곧 말을 돌려서 갔다. 나는 다시 들어가서 상주를 뵙고 늦은 아침에야 기거하던 곳에서 나왔다.
○平明李令成服 吾與睦台入吊 睦台卽回鞭 余又入見喪主 晩出寓舍
아침밥을 먹고 그대로 길을 나섰다. 길에 앉아 이국형(李國馨)인물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남면(南面)의 장재동(長財洞)공간으로 갔다. 그곳은 이른바 제언을 쌓을만한 곳으로, 이전에 윤선형(尹善衡)인물이 말했던 곳이다. 작은 섬 하나가 앞에 있었는데 그 이름이 자찬[尺贊]이었다. 자찬도공간의 양 머리를 가로질러 막으면 동쪽 변의 길이가 300발 정도 되고 서쪽 변은 200발 정도 될 것이다. 그 가운데는 40~50섬지기 정도 될 만 하였는데, 수원(水源)이 자못 좋아서 섬 안에서 제일이라고 한다. 큰 땅이면서도 형세가 매우 좋다고 이를 만하다. 다만 일할 곳이 꽤 넓어 작은 힘으로 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喫朝飯 仍發行 路坐待李國馨之來 偕往南面長財洞 所謂可以防堰處 乃前日尹善衡所言者也 有小島在前 其名尺贊자찬也 尺贊兩頭橫塞 則東邊之長可三百把 西邊可二百把 其中可容四五十石落 水根頗好 爲島中之最云 可謂大處而形勢甚好 但役處頗浩 非綿力可爲也
방향을 돌려 관왕묘(關王廟)공간 앞에 이르렀다. 이른바 조포(槽浦, 구유개)공간로서 이곳 또한 양 머리를 제언을 쌓아 막을만한 곳이다. 동쪽은 묘당산(廟堂山)공간 아래이고, 남쪽은 운주당(運籌堂)공간 아래인데, 두 곳 모두 100발이 되지 않았고, 그 중간은 20섬지기 정도 될 만 하였다. 수원이 장재포(長財浦)공간에 미치지 못하였는데도 오히려 이 숙부인물 댁의 부곡(釜谷, 가마구미)공간 제언보다는 낫다고 한다. 부곡공간은 일찍이 전혀 물이 없지는 않아 곡식을 먹지 못한 해가 없었다. 이 땅 역시 쉽게 얻을 수 없는 땅이라 이를만하며, 일하기에도 어렵지 않다. 이국형인물으로 하여금 첨사(僉使)개념에게 입안(立案)개념을 올리도록 하였다. 조포공간 남쪽의 섬이 크기는 작지만 길이가 조금 길어, 그곳이 바로 이른바 양 머리를 제언을 쌓아 막을만한 곳이었다.
轉到關王廟前 所謂槽浦구유개 亦兩頭防塞處也 東則廟堂山下 南則運籌堂下 而兩處皆不滿百把 其中可容二十石落 水根不及長財浦 而猶勝於李叔主宅釜谷堰 云 釜谷曾不以全然無水 無不食之歲 此亦可謂不易得之處 而役處亦不難矣 令李國馨呈出立案於僉使 浦之南有島小而稍長 卽所謂兩頭防塞處也
그 위에 작은 사찰공간이 있는데, 선방(禪房)이 있고 누대(樓臺)도 있었다. 체재는 구비하였으나 규모는 작았다. 승려 수십 명이 맞이하여 누대 위에 앉으니 또한 맑고 깨끗하여 흥취가 있었다. 누대 앞에는 대나무 숲이 울창하여 그윽하고 고요한 것은 좋았으나 시야를 가로막았다. 만약 대나무 숲이 없다면 줄지어 벌려 선 작은 섬들과 띠처럼 가로지른 푸른 바다가 모두 누각 바깥으로 펼쳐져 풍경이 기이하고 훌륭할 것인데, 속된 중들이 사리를 분별할 줄 몰라서 이런 경치가 전혀 없게 되었으니 안타깝다. 관왕묘공간와 절이 나란히 서 있는데 절과 관왕묘가 동시에 설립되었으며, 절은 관왕묘를 수호하기 위해 지어진 것으로 그 이름이 '옥천사(玉泉寺)공간'라고 하였다. 관왕묘공간를 지키는 승려로 하여금 가서 묘의 문을 열게 하여 들어가 보니, 정당(正堂)에 관운장(關雲長)의 소상(塑像)물품이 있었다. 서쪽에 가로로 낭무(廊廡)를 지어서, 진(陳) <Term id="M149" name="도독">도독(都督)인물</Person>의 위패를 안치하고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인물의 위패를 측면으로 앉혀 배향(配享)하였다. 진린인물이순신인물이 임진년(1592) 왜구를 무찌를 당시 관왕(關王)의 도우심이 있다고 하여 이 사당을 세웠다. 봄가을에 사당 앞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바깥쪽 바다가 곧 왜구를 격파한 곳이라고 한다.[1] <Term id="M597" name="첨사">첨사(僉使)공간의 진(鎭)</Place>이 그 남쪽에 있는데 언덕으로 가로막혀서 서로 보이지가 않았다.
其上有小刹 有房有樓 具体而微 有僧數十迎入 坐樓上 亦瀟洒有趣 樓前竹林叢鬱 幽靜可取 而遮却眼界 若無竹林 則小島之羅列 碧波之橫帶 皆在樓外 風景奇絶 而俗僧不解事 全沒此景 可嘆 關王廟與寺並立 寺與廟一時設 而寺爲守廟而作 其名 玉泉寺 云 令守僧釋行開廟門而入 則正堂有關雲長塑像 西作橫廡安陳都督位版 以忠武公李舜臣位版 橫坐配享 陳與李壬辰捷倭時 關王有神助 故立此廟 春秋設祭廟前 外洋卽破倭之處 云 僉使鎭在其南 而隔隴不相見矣
저녁 무렵 말을 돌려 부곡공간에 이르니 날이 이미 저물었다.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어 그대로 유숙하였다.
向夕回鞭 到釜谷 日已暮矣 不得前進 仍爲留宿
전날 저녁과 오늘 아침 밥은 이국형인물이 모두 준비해온 반찬으로 대접하였다.
昨夕與今朝之飯 李國馨皆備饌以供
























주석[ ]

  1. 진린과 이순신이 … 곳이라고 한다 : 『조선왕조실록』 숙종 36년(1710) 12월 17일 기사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지난 가을에 대신(大臣)들이 전라도(全羅道) 고금도(古今島)의 진인(陳璘) 도독(都督)과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사우(祠宇)에 사액(賜額)하는 일을 진달(陳達)하여 윤허받았는데, 나중에 듣건대 진 도독(陳都督)은 관왕묘(關王廟)를 창건하였고, 그후에 진 도독과 이순신을 동무(東廡)에 추향(追享)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관왕묘와 지세가 너무 가까와서 담장으로 경계를 구획(區劃)할 수가 없으니, 지금 만약 사액(賜額)한다면, 곧 관묘(關廟)의 액호(額號)이어야 합니다. 관왕은 마땅히 지존(至尊)으로 더불어 뜰을 나누어 대등한 예절을 갖추어야 할 사람이니, 그 묘우(廟宇)에 사액함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진 도독 또한 중국의 사명을 받들었던 장수이므로, 우리 조정에서 신하로 예대(禮待)할 수는 없습니다. 이순신과 함께 향사(享祠)하고 치제(致祭)하는 것은 방애(妨碍)됨이 많으니, 청컨대 대신(大臣)들에게 의논하소서.’라고 하였다.....(후략) (禮曹啓言: 大臣於前秋, 以全羅道 古今島, 陳都督璘及忠武公 李舜臣祠宇賜額事, 陳達蒙允, 追聞陳都督, 創建關王廟, 其後追享陳都督及李舜臣於東廡, 而與關廟, 地勢逼近, 不可限以垣墻。 今若賜額, 則便是關廟額號也。 關王當與至尊, 分庭抗禮之人, 不當賜額於其廟, 陳都督亦天朝奉命之將, 我朝不可以臣禮待之。 且與李舜臣, 同享致祭, 節目多妨礙, 請議于大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