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40313

jiam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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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4년 3월 12일 甲戌년 戊辰월 辛亥일, 양력 1694-04-07 1694년 3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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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4년 3월 13일 신해
十三日 辛亥
맑음
해남(海南)공간윤세임(尹世任)인물대장(代將)개념일 때의 일로 진주(晉州)공간에 정배(定配)되었는데, 출발하여 지나다 들렀다. 황세휘(黃世輝)인물, 윤경리(尹敬履)인물, 성덕징(成德徵)인물이 따라 왔다.
海南尹世任 以代將時事 定配晉州 發行歷見 黃世輝尹敬履成德徵隨來
파산(波山)공간묘갈물품 문은 지난번에 문중의 엇갈리는 의론 때문에 중도에 그만두었는데, 그 사이에서 중재하는 논의를 하는 자가 또 말하기를 ‘글자 수가 많으면 물력이 미칠 수 없으니, 현달(顯達) 여부를 막론하고 귤정공(橘亭公)인물 사촌 항렬까지만 기록하고, 또 우리 할아버지인물께서 조약(條約)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게 한 연유를 밝혀서 쓰라’고 하였다. 모두 구차하고 공정하지 않은 말이라 나는 단호히 거절하고 듣지 않았다. 그 후 윤서응(尹瑞應)인물 형제가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간곡히 말하기에, 내가 결국 이전의 문장에서 나쁜 부분은 쓰지 않고 좋은 부분은 남겨 오늘 제각(祭閣)공간에 나아가 썼다. 창아(昌兒)인물가 따라갔다.
○波山碣文 頃以門中橫議中輟 其間爲調停之論者 且曰字數多 則物力未逮 只限橘亭四寸行 無論顯達與否 沒書之 且書吾王考 以現立條約設祭之由 而皆是苟且不公之言 余牢拒不聽 厥後瑞應兄弟 以不可不爲之意 來語申申 余遂就前文而遏存 今日進祭閣而書 昌兒隨往
尹承厚尹顯龜尹碩龜尹玟尹琩尹璋來見

좌통례(左通禮) 묘갈문을 고친 초고.
공(公)은 휘(諱)가 사보(思甫)이고 성은 윤씨(尹氏)이며 해남인(海南人)이다. 휘 존부(存富)는 바로 공의 비조(鼻祖)다. 그 후손은 광혁(光奕), 형(衡), 효정(孝正), 천집(川楫), 환(桓), 진사(進士) 잠(岑), 사온(司醞) 직장(直長) 영동정(令同正) 광전(光琠), 봉상대부(奉常大夫) 군기소윤(軍器少尹) 단학(丹鶴)이다. 단학이 공을 낳았다. 공은 송씨(宋氏)에게 장가들어 아들 셋을 낳았는데, 호군(護軍) 종(種), 증(贈) 병조참의(兵曺參議) 경(耕), 무(畝)이다. 종(種)은 신운(莘耘), 신우(莘佑), 신흥(莘興), 신함(莘咸)을 낳았다. 경(耕)은 효인(孝仁), 효의(孝義), 효례(孝禮), 효지(孝智), 효상(孝常), 효원(孝元), 효정(孝貞)을 낳았는데, 효정은 생원으로 호가 어초은(漁樵隱)이며 참판(參判)에 추증되었다. 효의(孝義)의 손자 세좌(世佐)는 무과(武科)에 올라 현감(縣監)을 지냈다. 그 아들 정(定)은 무과에 올라 군수(郡守)를 지냈으며 택(宅)은 무과에 올라 현감을 지냈다. 효정(孝貞)의 아들 구(衢)는 문과(文科)에 올라 응교(應敎)를 지내고 판서(判書)에 추증되었고, 항(衖)은 생원(生員)이며, 행(行)은 문과에 올라 목사가 되었고, 복(復)은 문과에 올라 감사(監司)를 지냈다. 좌통례와 숙인(淑人)의 봉증(封贈)은 이 때문이다. 구(衢)의 아들 홍중(弘中)은 문과에 올랐으며 정랑(正郞)을 지내고 판서(判書)에 추증되었다. 의중(毅中)은 문과에 올랐으며 우참찬(右參贊)을 역임했다. 행(行)의 손자 광계(光啓)는 문과에 올랐으며 정랑(正郞)을 지냈다. 의중(毅中)의 아들 유심(唯深)은 부사(府使)를 지냈고, 유기(唯幾)는 문과에 올라 감사를 지냈으며 홍중(弘中)의 계후자가 되었다. 유심(唯深)의 아들은 선언(善言)과 선도(善道)인데, 선도는 문과에 올라 참의를 지내고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가 충헌(忠憲)이다. 유기(唯幾)의 후사가 되었다. 그 아들 인미(仁美)는 문과에 올랐으며 헌납(獻納)에 추증되었다. 의미(義美)는 진사(進士)로, 선언의 후사가 되었다. 예미(禮美). 복의 현손(玄孫) 항미(恒美)는 무과에 올랐으며 현감을 지냈다. 인미의 아들 이석(爾錫)은 전부(典簿)를 지냈다. 의미의 아들 이후(爾厚)는 문과에 올라 정언을 지냈고, 예미(禮美)의 계후자가 되었다. 내외자손(內外子孫)은 천 명이 넘어 모두 실을 수 없고, 다만 이름이 드러나 선조를 빛낸 자만을 거론한다. 이미 세대가 멀어지고 친진(親盡)하여 제사가 오랫동안 끊어졌는데, 기축년(己丑年)에 충헌공이 조약(條約)을 세우고 제전(祭田)을 마련하여 해마다 계추(季秋)에 종인(宗人)들을 데리고 한번 제사를 지내는 규정을 만들었다. 당초의 묘표(墓標)는 현손 흠중(欽中)과 여러 자손이 함께 세웠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글자가 닳아서 지금 다시 새것으로 바꾸고 나서 나에게 사실을 기록할 것을 부탁했다.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오른쪽과 같이 약술한다.
증(贈) 숙인(淑人) 송씨(宋氏)는 증(贈) 좌통례(左通禮) 윤사보(尹思甫) 공의 부인이다. 자손이 번성하여 높은 관직에 오른 이가 많았으니 해남 윤씨의 창대함이 이분에게서 비롯하였다. 좌통례(左通禮) 공(公)께서 덕을 두텁게 쌓으셨음을 여기에서 알 수 있으며, 또한 숙인(淑人) 송씨(宋氏)의 아름다운 성덕(盛德) 덕택에 이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아아, 위대하도다! 묘표가 세월이 오래되어 자획이 닳아 떨어져나가 여러 후손들이 새 돌로 다시 세웠다. 자손들에 대해서는 좌통례(左通禮) 공 갈(碣) 뒷면에 대략 기재하였으니, 여기에는 다시 기술하지 않는다. 후손 이후(爾厚)가 삼가 기록하다.

左通禮碣文改搆草
公諱思甫姓尹氏海南人也 有諱存富卽公之鼻祖 其後曰光奕 曰衡 曰孝正 曰川楫 曰桓 曰岑進士 曰光琠 司醞直長令同正 曰丹鶴 奉常大夫軍器少尹 寔生公 公娶宋氏 生三男 曰種護軍 曰耕贈兵曺參議 曰畝 種生莘耘莘佑莘興莘咸 耕生孝仁孝義孝禮孝智孝常孝元孝貞 生員號漁樵隱 贈參判 孝義孫世佐 武科縣監 子定武科郡守 宅武科縣監 孝貞子衢文科應敎贈判書 衖生員 行文科牧使 復文科監司 左通禮淑人封贈以此也 衢子弘中文科正郞贈判書 毅中文科歷右參贊 行孫光啓文科正郞 毅中子唯深府使 唯幾文科監司爲弘中後 唯深子善言善道 文科參議贈判書諡忠憲 爲唯幾後 子仁美文科贈獻納 義美進士爲善言後 禮美 復玄孫恒美武科縣監 仁美子爾錫典簿 義美子爾厚文科正言 爲禮美後 內外子孫過千 不可盡載 只擧名顯以光祖先 旣代遠親盡 香火久絶 己丑歲 忠憲公立條約置祭田 爲每歲季秋率宗人一祭之規 當初墓標 乃玄孫欽中與諸孫共立而年久字刓 今又易新 仍屬爾厚記實 不敢辭略述如右
贈淑人宋氏 卽贈左通禮尹公諱思甫配也 子孫衆盛 冠冕煥爀 海南尹氏之大始此 左通禮積德之厚 於此可見 亦豈非淑人懿德之盛 有以致之也 嗚呼偉哉 墓標年久 字畫刓缺 諸孫又改新石 而子孫略載左通禮碣陰 此不復述云 後孫爾厚謹識